題德山溪亭柱
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鍾 청컨대 천석 종을 보라
非大扣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
爭似頭流山 우선 두류산과 같은 것은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
...
<題德山溪亭柱>은 덕산 계정 기둥에 쓴 것으로 平起式으로 경운(庚韻)을 사용하였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한계(限界)가 있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우리가 평소에 듣는 것은 작은 소리이다. 우주가 움직이는 소리 지구가 회전하는 소리 등과 같은 큰 소리나, 있는 힘껏 두들겨도 울지 않는 큰 종의 존재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대하무성(大河無聲) 대도무문(大道無門)을 보아도 그렇다.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아니 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큰 길에는 문이 있을 수가 없다. 사방으로 통하는 문이 많으니 어느 곳으로도 다 통할 수가 있다. 남명은 천석이나 되는 종과 두류산인 지리산 천왕봉을 견주어 생각했던 것 같다. 비록 하늘은 울어도 지리산 천왕봉은 아직까지 울지 않았다는 것이니 얼마나 그 마음이 호방한가?
이 시의 작자 조식(曺植, 1501-1572)은 두 차례의 사화를 직접 경험했다. 기묘사화 때에는 숙부가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많은 친구들이 희생당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남명은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13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중요시 여겨 경(敬)과 의(義)를 강조하였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그의 사상은 경상우도의 학풍으로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서 투철한 선비 의식을 보여 주었다.
남명은 항상 성성자(惺惺子)란 작은 두 개의 방울을 옷고름에 달고 다니면서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자 했고,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를 새긴 경의검(敬義劍)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