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
광개토왕비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碑)는 414년(장수왕 3년)에 세워졌다. 비(碑)의 위치는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있으며, 비석은 하나의 거대한 응회암(凝灰岩)으로, 자연석 그대로의 장방형(長方形) 기둥모양이다. 각면은 1.3~2m정도이고 높이는 6.34m이며 중량은 약 37톤에 달한다. 동남향의 1면에는 11행이 있고, 2면에는 10행이 있으며, 3면에는 14행, 4면에는 9행이 있어 총44행이다. 매행에는 41자가 새겨져있으며, 총 1775자정도이다. 광개토대왕비는 1880년 무렵 재발견되었는데,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일부 비면이 부식되거나 마멸되었고, 비신에 깔려있는 문자를 판독하고 탁본하기 위해 이끼를 불태우는 과정에서 비문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므로, 이 중 150여자가 판독 불가능한 상태이다.
비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 광개토왕의 선조와 그의 치세 등을 간단히 적었고, 그 다음 광개토왕의 업적중에서도 특히 그의 정복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하였으며, 끝으로 광개토왕의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제까지 이와 유사한 형식과 크기의 비는 알려진 예가 없으며 과학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고대사회에서 무게가 37톤가량이나 되는 비석을 세운다는 것은 고구려의 국력을 기울인 대사업중의 하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1) 기사에 실린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시작된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 부분의 내용은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후에 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활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진다. 이후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기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등장하였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는 위 기사의 주어를 "倭"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신묘년 이래 왜가 도래하자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현재 주류,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 역사학자 대부분의 해석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설이 있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한다.
글자는 먼저 계선(界線)과 계선사이를 최대한 이용하였고, 곡선보다는 직선을 위주로 사용하고 있어 장중하고 근엄한 느낌을 갖게 한다.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석자체가 자연석을 사용하였듯 글씨 또한 천진난만하며, 무관심(無關心)한 듯, 무작위(無作爲)한 듯한 모습이 드러난다. 단순하지만 대범하여 그야말로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거침없이 달려가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글씨는 전서에서 팔분예서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고예(古隸)이다. 고예에는 팔분예에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파임이 없다. 획의 굵기 변화도 없고 간격도 비교적 일정하지만 참으로 기기묘묘한 변화를 느끼게 된다.
필자는 이번 10월에 충북 영동 황간에 세울 삼국시대비를 지난 7-8월경에 집자하였다. 비에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로 온달장군의 설화를, 무녕왕릉지석의 글자로 서동요를, 신라명필 김생의 글씨로 처용가를 집자한 것이다. 앞으로도 황간에는 우리 한국의 선인들이 썼던 글씨가 새겨질 것이며 한국의 서예를 대표할 수 있는 비림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는 한국의 서예가 중국위주의 글씨에서 벗어나 한국 서예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국서예를 선양하기 위한 중요한 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광개토왕은 우리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리게 했던 위대한 왕이나 중국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독도망언 등이 이어져 우리 국민들은 가슴이 떨리는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제 당하고 나서 떠들어대고 잠깐 시끄럽다가 이내 무관심해버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깊이 연구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선양하여 우리의 자존을 굳게 지켜 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