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연속
실패의 연속
그러나 작물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그저 신기하고 고맙습니다.
지난여름에는 줄기차게 비를 퍼붓더니
일단 비를 멈추고는
빗방울조차도 구경할 수 없게 만드네요.
확실한 우기, 확실한 건기
하늘도 지조를 굳게 지키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주변에 일들이 있어
한동안 밭에 가지 못하다가
벌초를 일찌감치 끝내고
오랜만에 들렀더니
어떤 것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맨발로 뛰어나오고
어떤 것들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지나가고
어떤 것들은 사람을 보고도 시큰둥하고
어떤 것들은 큰 병에 걸렸는지 알아 누웠고
어떤 것들은 저 세상으로 간 지 오래되었다고들 합니다.
나 원 참!
먼저 가시상치와 달랑무입니다.
가시상치는 고들빼기를 두고 말하는 것 같은데
집사람이 그와 비슷하게 생겼고
정확한 이름을 잘 모르기에 붙인 이름인 것 같습니다.
치마상치의 넓은 치마폭과 같이 생긴 것이 아니라
잎의 좌우측면이 톱니처럼 나있어 그렇게 명명했습니다.
무성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잘 살아준 편입니다.
달랑무를 찍은 것입니다.
어떻게 잘된 부분들은 제쳐두고
잘 안된 부분만 올렸느냐고 집사람에게 하두 혼이 나서
이번에는 잘된 부분만 오려서 올립니다.
이곳만 살아있습니다.
이거라도 살아주니
내가 이곳에 달랑무를 심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어떤 곳은 씨를 뿌리긴 했는데
싹이 나오지 않으니
둘 다 잊어먹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무엇을 뿌렸지?
머리도 좋지 않은데 보이는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좌우간 무엇이든 간에 죽은 것은 확실하니
극락왕생이나 빌어줘야겠습니다.
도라지와 들깨입니다.
도라지는 잡풀이 우거져 산 줄도 몰랐는데
잡풀을 제거해주니 군데군데 살았네요.
씨앗 다섯 봉지를 사서 뿌렸는데
요정도 남았으니
마치 적벽대전을 치루고 난 조조군 같습니다.
이번에 가니 너도 사람이냐며 돌아앉아 눈도 마주치지 않습디다.
미얀허다. 도라지야! 토라지지 마라! 돌아앉지도 말고!
들깨는 지난 늦여름 모종을 했는데
무더기 져서 잘 자라다가
비 구경도 못한 덕에 그리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거름을 하고 비료도 뿌렸지만
비가 오지 않으니 비료가 굴러다닙니다.
이번에 물을 조금 주었습니다.
목축임이나 했으려나?
땅콩과 마입니다.
땅콩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지나가는 마을사람들이 끌끌 혀를 차며
“북을 돋아줘야 땅콩이 달리지” 하기에
덩어리가 진 좋지 않은 흙이나마
호미로 끌어 모아 주었더니
약간의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
이게 마입니다.
살수대전에서 패한 수나라 군사들처럼
오랫동안 내렸던 빗줄기에 전멸되었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그래도 생명이 위대한지
무성한 풀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네요.
풀을 뽑다가 실수로 하나를 뽑았습니다.
봄에 콩알만한 씨앗을 심었는데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그 콩알이 세 개로 이자를 붙여 뽑히네요.
무와 배추입니다.
무와 배추는 진땅에 심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잘 살라고 비가 온 축축한 땅에 무와 배추씨를 뿌려놓았죠.
고맙게 다음날 비가 많이 왔지요.
마침 누군가 무와 배추를 심는다기에
남은 씨앗을 모두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싹이 잘 나온다고 이야기를 하길래
우리 것은 나를 닮아 조금 늦는가보다
설마 모두 죽었을라구? 그런 생각만 했었습니다.
다음 주에 가보니 역시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배추와 무는 진흙이 아닌 곱고 보드리운 흙에 뿌려야 한다네요.
진흙에 씨를 뿌렸고 다음날 비가 왔으니
죽을 수밖에요.
세상에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말없이 저승으로 가버린 씨앗에게는 미안하지만
또 하나 배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배추입니다.
워낙에 실패의 연속이다 보니
모종을 사다가 심기도 하고 씨를 뿌리기도 했는데
이곳은 씨를 뿌렸던 곳입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씨를 뿌리고 아무 소식이 없기에
나중에 농협에서 모종을 사다가 심은 것입니다.
역시 배추입니다.
씨앗을 뿌리던 날 모종도 한 것입니다.
다음날 비가 온다기에
비가 오면 모종도 잘 살겠거니 하고 사다가 급히 심었는데
심고 나서 비가 오면 대부분 죽는다고 하네요.
잎이 약한데 흙이 잎에 튀면 잎에 땅에 들러붙게 되고
숨을 쉴 수 없는 잎은 결국 죽게 된다나요?
심고 나서 거의 죽여 놓았는데
누군가가 왕겨를 뿌려놓으면
흙이 튀지 않는다고 귀뜸을 하니.
사후 약방문인가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가요?
많은 모종을 잃었지만 또 한 수 배웠습니다.
이것들은 다 죽어가는 것들이었는데
EM이라는 미생물약을 뿌려주었더니 다시 살아난 것들입니다.
개중에 아주 약간은 잘 자란 것들도 있습니다.
집사람은 이렇게 자란 것도 신기한지
추석이 지나면 김장도 담그고 싶다네요.
시들고 죽은 것들만 보다가 오랜만에 성한 것을 보니
사람도 작물도 신이 났나 봅니다.
“너는 누구니? 네이름이 뭐니?”
.......................
“꼭 솔잎 같지 않아?”
........................
........................
“니가 심어놓고도 니가 모르냐?”
“내가 부추다.”
장마빗속에 그렇게 담가 놓았으니 ...
이래 뵈도 석 달이나 자랐다네요.
조금 베어 오이와 함께 부쳐놓으니
뻣뻣한 것이 솔잎과 같습니다만
약간 부추의 향기가 나기는 합니다.
부추 맞습니다. 그래 너도 부추다.
잡풀에 보이지도 않다가 풀을 뽑아주고 나니
비실비실 드물게 나서 오래도록 그 모양으로 자랐기에
단단해졌습니다. 조금 지나면 산삼 향기도 날 것 같습니다.
실파도 한 봉투를 모두 심었지만
거의가 죽고
겨우 이것만 남았기에 몰아놓은 것입니다.
흩어져 있을 때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존재의 의미조차 없더니
모아놓으니 서로 얘기도 하고 지네들끼리 친해졌나봅니다.
아욱과 엇갈이배추입니다.
아욱씨를 뿌렸더니 바로 나오길래
이제는 잘 자라려나 했는데
몇 주째 이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거름도 많이 주었는데. 그것으론 많이 부족한가보네요.
아직은 땅의 거름이 약하다보니 잘 되지 않으려나 봅니다.
이것도 작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엇갈이 배추는 조금 자라기는 했는데
역시 비가 오지 않아 주춤합니다.
오늘 물을 조금 주고왔으니 그래도 조금더 무성해지려나?
다음주에 속아주어야할 것 같습니다.
열무입니다.
그래도 자라나는 것이 대견합니다.
오랫동안 비를 보지 못했으니 얼굴이 누렇게 떴습니다.
내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죽기전에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물! 물! 물! 하길래
물을 뿌려주었더니
기지개를 펴고 좋다고 야단들입니다.
쪽파입니다.
생명력이 무척 강한가 봅니다.
다른 것들보다 같은 여건에서도 이렇게 자란 것을 보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너도 물을 듬뿍 줄 테니 잘 살기나 하거라.
옥수수와 콩입니다.
비료를 주었고 거름을 주었더니
비교적 잘 자란 것들입니다.
지난주에 옥수수가 달렸고 수염이 제법 말랐기에
이제는 먹어도 되려나 하고 이십여자루 땄었지요.
삶으려고 껍질을 벗기니 아직 알이 영글지도 않았습니다.
산 것이었다면 어떻게 이런 것들을 팔겠냐며 불평할 텐데
내가 심고 내가 딴 것이니 불평할 곳도 없습니다.
먹보 아들놈에게 주니 좀 실한 것은 먹고
대부분은 알이 덜 찼다고 쳐다도 보지 않습디다.
괴씸한 녀석!
콩은 제법 잘 자랍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객토를 하면
이삼년간 콩을 심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맞는가봅니다.
그러고보니 이곳이 일본 731부대 같습니다.
내년에는 모든 작물을 마루타로 만들지 말고
잘 자라는 콩이나 심어야겠습니다.
토란과 파프리카입니다.
토란은 꽤 여러 주를 심었는데
장마에 겨우 살아준 것들입니다.
모든 것들이 싹을 틔웠다가 죽고
세상 빛도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몇 주 남아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지도 않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들이나마
즐거운 삶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파프리카입니다.
장마에 모든 고추가 탄저병에 걸려 죽어나가기에
우리는 익기도 전에 제대로 크기도 전에
미리미리 따먹으니 병에 덜 걸렸던 같습니다.
시들어 죽은 것도 있지만
그래도 더러더러 열매를 열어 줍니다.
호박고구마와 황금고구마입니다.
물에 잠겨 있었기에 줄기에 뿌리가 많이 달렸습니다.
가끔 걷어주기는 했는데
다음 주에 가보면 또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기를 거듭하여
줄기마다 마디마다 뿌리가 성하게 나오니
고구마가 과연 안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손이 안 간다고 많이 심었고
주위 사람들은 고구마 캐러 오겠다고 말들을 하는데
줄기에서 뿌리까지 무성하게 내리니 얼마나 열릴지?............
사람들 오라고 해놓고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는 해야 할 텐데.
간다고 인사를 하니
몇몇은 손을 흔들고
몇몇은 내가 가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어느새 도인이 되었는지 세상에 초연한 것들도 있습니다.
집사람은 조금 많이 봤다고 친근해들 하는데
저한테는 시큰둥합니다.
제가 잘못 살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