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避亂漣川 有感而作

향수산인 2012. 3. 24. 17:11

 

避亂漣川 有感而作

 

 

이 시는 학곡 홍서봉[鶴谷 洪瑞鳳, 1572~1645]이 연천(漣川)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 곳에서 너무나도 기가 막힌 광경을 목도하고 그를 고발한 글이다. 연천은 경기도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동으로는 포천, 서로는 파주, 북으로는 철원, 남으로는 동두천과 연접해 있다. 이곳은 백제건국후 백제영역에 속하였으나, 고구려 광개토왕 때에는 고구려 영역에 속하여 공목달현으로 불렸으며, 고려태조 23년(940)에는 장주(獐州)로 변경되었고, 고려충선왕 원년(1310)에는 연천(漣川) ․ 연주(漣州)로 개칭된 곳이다. 오도일(吳道一)이 지은 다음 공의 「청시행장(請諡行狀)」구를 보면, 이 시가 지어진 시기가 임진년(1592년)일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년 왜구의 변에 공은 이미 피난할 곳에 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난이 일어나자 유씨부인을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때마침 지천황공부자(芝川黃公父子)가 왕자들을 모시고 북으로 피난하다가 우연히 철원(鐵原)에서 만나게 되었다. 공에게 함께 가자고 했으나 공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북으로 피난하던 장계공이 조난을 당했는데 일행중에 이를 면한 자가 없었으니 공의 선견지명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壬辰倭寇之變 公已經營避地計 及亂作 奉柳夫人奔避 時芝川黃公父子陪王子而北 偶逢於鐵原 要公同入 公辭不行 及長溪公遭難 一行無免者 先見之明 多類此]

 

 

이를 보면 학곡의 예지력이 신기에 가깝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것도 피할 곳을 미리 생각해 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의 행장을 보면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온한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고 한다. 공이 여섯 살 때 외사(外師)에게 글을 배웠는데 스스로 글을 지을 줄을 알아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루는 계부(季父) 익성군(益城君) 성민(聖民)이 시험삼아 “고양이 묘자로 글을 지어보라.” 하자 “한 마리의 고양이가 울면 천 마리 쥐들이 놀라 달아난다네.[貓鳴驚千鼠]”라고 했다. 익성군이 너무 기특하게 여기면서 “이 아이는 한갓 글을 지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소인들이 반드시 이 아이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라 했다 하니, 어린 시절부터 공의 글솜씨나 총명함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避亂漣川 有感而作>이란 글을 잠시 감상해보자.

 

 

寒女鳴機瀉淚頻 撲天風雪夜來新

明朝截與催租吏 一吏纔歸一吏嗔

 

가난한 여인 베를 짜며 연신 눈물 쏟는다네.

하늘 가득 눈보라에 밤새 눈이 또 내리고.

아침이면 세리(稅吏)에게 베를 잘라 바쳐도

겨우 하나 돌아가면 다른 관리 찾아와 성을 낼 테니.

 

 

한녀(寒女)는 가난한 집의 딸이며, 명기(鳴機)는 베틀을 울리며 베를 짜는 것이다. 사(瀉)는 쏟는다는 말이니 사루빈(瀉淚頻)이란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주 쏟는 것이다. 베를 짜며 왜 눈물을 쏟을까? 자신과 가족들이 입을 옷을 짠다면 가족들이 따뜻해하고 좋아할 것을 떠올리며 즐거울 텐데 말이다. 베를 팔아 무엇이라도 장만하리라는 기대감이라도 있으면 어찌 눈물이 나겠는가? 공은 여기서 가난하고 어려운 현실과 여인이라는 나약함을 등장시킨다. 어쩔 수 없다. 죽기보다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베를 짜야만 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박(撲)은 모두 ․ 다하다는 의미이다. 박천풍설(撲天風雪)이란 눈보라가 몰아쳐 천지를 구분할 수가 없는 날씨이다. 온천지에 눈보라가 치니 어디 피할 곳도 없다. 게다가 신(新)이라는 글자를 보면 이러한 날씨가 하루 이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제도 눈이 내렸고 그전에도 눈이 내렸는데 밤새 눈이 또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밤새도록 베를 짜야만 하는 나약한 백성들의 비애가 그려진다. 내일 아침이면 세(稅)를 재촉하는 야수같은 관리가 올 것이요, 그 놈이 오기 전까지 정해진 양을 만들어놔야 한다. 여인은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베를 짠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또 다른 관리가 찾아와 호통을 치고 협박을 하면서 베를 내놓으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부하면 관아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을 것임을 눈물이 암시하고 있다. 나라에는 왜구가 쳐들어와 엉망이 되었는데 관아의 관리라는 것들이 백성들에게 이러한 짓을 일삼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리 없다. 가난한 집 여인이라면 베를 짜서 먹을 것을 사고 땔나무를 구하고 입을 옷을 장만해야 하지만 비정하고 사나운 관리들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참으로 죽지 못해 겨우겨우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의 삶이 그야말로 처절하다.

 

경제가 어렵고 백성들은 고달픈데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축재에 혈안이 되어있는 놈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거철이 되면 국민을 위한 머슴이 될 테니 자신만을 뽑아달라고 굽실대다가, 일단 당선이 되고나면 신분상승을 운운하고 서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갖은 권력을 동원하여 서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다. 백성들을 감시하며 협박할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거둬들인 세금을 자신의 재산인 양 흥청망청 뿌려대며 온갖 공약을 쏟아내고 이를 뒤바꾸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는 탈세를 하고 검은 돈을 주고받으면서도 선의(善意)를 운운한다. 시군의회나 지방자치의 폐해를 알면서도 정치적인 논리 때문에 이를 시정하려는 움직임도 없다. 정치에 관심없는 어떤 이는 사재를 털어 독도를 지킨다고 하는데,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노라고 자신만이 진정한 국민의 일꾼이라 악을 쓰던 놈들이 공천을 받지 못했다고 울고불고 야단들이다. 그들에게 과연 나라가 있는가? 그들에게 과연 국민이 있는가? 그들의 마음속에 과연 불쌍한 서민들이 있는가?

 

학곡(鶴谷)을 언급하며 공의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흥양유씨(興陽柳氏)를 빼놓을 수 없다. 『해동소학』에 전해오는 글이다.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의 모친은 집이 몹시 가난하여 거친 밥과 나물국도 떨어져 굶을 때가 많았다. 하루는 종을 보내어 고기를 사오게 하였는데 고기의 빛깔이 변하여 독이 있는 듯하였다. 부인은 계집종에게 묻기를 사온 고기가 몇 근이나 남아있는가를 묻고는 마침내 머리장식을 팔아 돈을 마련해서 종을 시켜 그 고기를 모두 사다가 담 밑에 묻게 하였다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이 혹시라도 그 고기를 사다가 먹고 병이 날까 염려해서였다. 학곡공은 항상 말하기를 “어머니의 이 마음이 신명에 통할만하니 자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이 아들을 교훈할 땐 엄정하여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반드시 추호의 사정도 없이 피가 흐르도록 종아리를 쳤고, 종아리를 친 회초리는 반드시 비단보에 싸서 깊이 간직하였다. 딴사람이 그 간직하는 이유를 물으니 “이 아이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우리 집의 흥망이 달렸으니 가장 중대한 일이 아니냐?”고 대답하였다. 학곡공도 만년에 자제들에게 비단보자기 안에 회초리와 종아리의 흉터를 보이면서 “나의 엄사(嚴師) 어머니의 유품으로 오늘의 내가 있게 된 징표이다.”라 했다 한다.

 

또한, 부인이 만년에 두모포(豆毛浦)의 독서당(讀書堂)을 지나다가 당에 올라 구경을 하고 있는데, 수직하는 사람이 옥배 하나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잔은 호당(湖堂)이 아니면 마시지 못합니다.”하니 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여자지만 나의 시아버님(석벽 홍춘경) ․ 남편(율정 홍천민) ․ 시동생(졸옹 홍성민) ․ 아들(학곡 홍서봉) ․ 친정조카가 다 같이 호당으로 뽑혔으니 나 홀로 이 잔을 마시지 못하겠는가?”하였다 한다. 자식을 위한 엄격함과 백성들을 위한 따뜻함이 우리 가문의 이러한 영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철이다. 백성들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좋아하는 사람, 백성들의 고초를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사람, 그렇지만 자신에게는 엄정한 사람, 항상 청렴하고 노력하는 진실한 사람은 이처럼 세대를 초월하여 존경받을 것이다. 흥양유씨나 학곡공이 돌아가신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를 추모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바로 그들의 이러한 마음에 연유한 것일 게다.

 

 

- 도곡 홍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