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광장/사진동정

[스크랩] 꽃과 송림

향수산인 2012. 7. 24. 08:52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지고 훌쩍 떠나는 여행이 더 실속있는 경우가 있다. 더 더워지면 본격적인 휴가철이라 피서객들로 붐빌 것 같고 복잡한 머릿속도 비울 겸 갑자기 연락을 해 날을 잡았다. 큰누님내외, 둘째누님, 우리 내외. 특히 큰 누님과는 띠동갑인지라 아무래도 어려웠기에 그간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고, 그래서 이번 나들이는 아마 처음으로 기억된다. 워낙에 통이 크고 말솜씨가 좋은 큰 누님, 늘 부지런하시고 반듯하신 자형, 재주 있고 마음 착한 둘째 누님, 그리고 나를 만나 고생문이 열린 집사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마음이 짠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고통보다 집안식구 형제들의 마음을 먼저 혜아리는 사람들이다. 나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러다가 문득 늙어버리면 힘이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사람들은 그렇게 한 세상을 고해삼아 사는 것 같다. 그러니 어찌 생각하면 나는 욕심쟁이다. 나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대신 능력없는 나의 존재는 형제남매간에 큰 도움을 줄 수 없었고 집안살림살이에도 큰 보탬이 되지 않았으니 부끄러운 면을 감출 수 없다.

좌우간 새벽공기를 가르며 차가 달린다. 비봉 서평택 송악 당진 해미 홍성 막힘이 없다. 바다내음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멀리 간월도가 보인다.

 

秋風江樹曉 가을바람 江樹로 불어대는 새벽

客子坐禪樓 어느 한 나그네 선루에 앉았는데

列岫奔如浪 줄이은 봉우리들 달리는 것 파도같고

孤庵穩似舟 외로운 암자는 평온하기 배같아라

 

이 시는 어느 가을 푸른 봉우리가 끊임없이 어어지는 것이 거친 물결처럼 출렁이는 듯하고 그곳에 암자가 배처럼 떠있으며, 이러한 광경이 보이는 건너편에 한 나그네가 한가로이 앉아있는 그림을 묘사한 글이다. 비록 삼복더위속에 지나는 길이지만..... 멀리서 보면 간월암은 겨우 파도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태롭기 짝이 없다. 어떻게 저기에다 절을 질 생각을 했을까? 아마 오가지도 못하는 인생의 절벽에서, 오갈 데가 없는 생각의 끝에서, 그들은 바로 부처를 생각했고 불도를 생각했는 지 모르겠다.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대화너머로 잠깐이지만 여러 생각들이 스쳐지난다.

간월암은 예전에 만공스님이 기거했다는 이야기로도 알려져 있지만, 간만의 차에 따라 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곳이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방송매체를 통해 자주 소개되는 곳이다. 모처럼 함께가는 길이라 들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의 정체가 염려되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송림사에 들어서니 언제나 그렇듯 스님과 보살님이 반갑게 우릴 맞는다. 이곳은 그야말로 절간이다. 명동거리처럼 사람들이 북적이는 관광지가 아니라, 가끔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고나면 언제나 조용한 그런 절간이다. 스님을 뵈면 욕심이 없어 몇번을 보아도 한결같고 평안하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곳을 들렀다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절로 고요해지고 심난했던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집사람도 그런 것을 보면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같다. 현문선원에 들러 스님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海底泥牛含月走 바다 밑의 진흙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巖前石虎抱兒眠 바위 앞의 돌호랑이 아기 안고 졸고 있다

鐵蛇鑽入金剛眼 쇠 뱀은 금강안을 뚫고 들어갔는데

崑崙騎象鷺絲牽 곤륜산이 코끼리를 타고, 해오라기 이를 끄네.

 

이는 현문선원의 주련으로 쓰여져 있는 고봉선사의 선시이다. 언뜻보면 황당한 이야기지만 가만히 새겨보면, 하늘에 뜬 달이 바닷물과 교감을 이루며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운행하는 모습, 바위 앞에 호랑이가 자신의 새끼를 품에 안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모습, 땅속으로 들어가는 뱀의 역동성, 웅장한 곤륜산과 그위로 우아하게 나는 해오라기의 모습이다. 모두가 생동하는 자연 그대로이다.  현문선원도 그래서 이렇게 지었나보다. 기둥도 자연 그대로, 대들보도 자연 그대로, 현판이나 주련의 나무도 구불구불 자연그대로이다.  튼튼하게 가급적 인위적인 부분을 덜어 자연을 옮겨놓았다. 자연을 나의 욕심대로 가공한 것이 아니라, 나의 일정대로 급하게 꾸민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의 상태를 보아가며 튼튼하게 지은 목조건물이다. 절을 이렇게 꾸몄으니 여기서 수행하는 사람들도 분명 이를 닮은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바로 일몰이 유명한 꽃지 해수욕장이다. 아니 이곳은 서해안을 따라 해수욕장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고 배가 쉴새없이 드나들며 사람들도 그렇게 오고간다. 그들이 욕심이 있어 왔건, 욕심을 버리려고 이곳에 왔건, 혹은 아무 생각도 없이 이곳에 왔건,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가 자연이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고 자연을 닮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 그 자체가 바로 극락일 것이다. 아니 내가 서있는 바로 이곳이 수정궁인 줄 모르고 사는 늙은 낚시꾼과 같은 심경이리라. 그런데 어찌 너희들은 이를 모르느냐고 지팡이를 쿵쿵 내리치며 할을 하는 고승처럼 대승전의 주련이 바다를 향해 서있다.

 

碧波深處釣魚翁 푸른 물 깊은 곳에 고기잡는 늙은이

抛餌牽絲力已窮 먹이 던져 줄 당기다 힘이 다했네

一棹淸風明月裡 배 한척에 맑은 바람 밝은 달 실렸지만

不知身在水晶宮 자신이 수정궁이 있는 줄도 모르누나.

 

잠시 송림을 거닐며 길게뻗은 소나무줄기의 생동감을 느끼다가도 일제때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일본군이 행했던 악랄한 수난의 흔적이 드러날 때마다 장중함 뒤에 감춰진 수많은 고통이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고 있는 작은 꽃들도 그저 눈에만 보이는 화려함이 그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래, 모든 것을 내려놓자. 누구이기 때문에 바램이 있었고 누구이기 때문에 원망이 있었더라도 모든 것은 자연의 이법대로 흘러갈 것이다. 어찌 한 인간의 욕심으로 이를 좌지우지 할 것인가? 그들이 욕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도 약간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으리라.  그 미련이 있어 답답해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화가 났던 것같다. 스스로를 핡퀴고 스스로 아파하면서 마음에 병도 깊어갔던 것같다. 그가 누구이건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서운할 것도 없을 것이다. 미끼를 던졌으나 물고기는 낚지 못하고 빈 배에 한가득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 그런 어옹처럼 말이다.

 

 

출처 : 숙지산 공간터
글쓴이 : 도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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