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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4. 온천명(唐, 李世民)

향수산인 2009. 6. 10. 11:54
 

 

34. 溫泉銘(唐, 李世民)


당 태종인 이세민(李世民, 591-649)은 농서성기(隴西成紀, 지금의 甘肅省) 사람으로 역사에서 유명한 개명(開明)황제이다.  그는 23년의 재위기간에 유력한 조치를 취해 당나라의 문치와 무공이 가장 번영하여 역사에서 ‘정관지치(貞觀之治)’라 칭찬받고 있다.  그는 또한 학술을 좋아하고 예술에 정통했으며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해서 구양순과 우세남을 학사(學士)로 임명했다.  그리고 서예로 선비를 취하는 파격적인 방침을 내세워 널리 인재를 구함에 많은 묵객들이 출세를 하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이세민은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마음으로 사모하고 손으로 추구함에 여력을 남기지 않았다.  내부의 금과 비단을 내어 천하에 있는 왕희지 묵적으로 사들여 서단에서 왕희지를 숭상하는 풍토를 열었다.  이는 당나라 서예가 번영을 이루는 근본적인 작용이 되었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진사명(晉祠銘)>과 <온천명(溫泉銘)> 등이 있다. 

<온천명>은 이세민이 글을 짓고 직접 쓴 것으로 원석은 이미 없어졌고 단지 초당의 고본(孤本)만 전해지며 48행이 있다.  끝에 ‘영휘사년팔월위곡부과의아(永徽四年(653)八月圍谷府果毅兒)’라는 한 줄이 있다.  청나라 광서(光緖) 26년(1900) 도산인 왕원록(王圓箓)이 돈황의 명사산(鳴沙山)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했는데 후에 프랑스 사람에게 들어가 현재 프랑스 파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세민이 비록 왕희지를 글씨를 매우 좋아했지만 그의 서풍은 왕희지와 매우 다른 면이 있다.  주장문은 『속서단(續書斷)』에서 “붓 휘두름이 굳세고 아름다우면서 표일하여 난새와 봉황이 날아오르고, 규룡이 뛰어오르는 것 같아 가장 묘하다.”라고 했다.  이세민 자신도 “지금 나는 옛사람들의 글씨를 임서함에 있어서도 그들의 형세는 배우지 않고 오직 그것의 골력을 추구하여 형세가 스스로 나타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내가 하는 것은 모두가 먼저 필의를 작정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과연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된다.”라고 한다.  지금 전해지는 글씨를 보면 확실히 이런 풍격과 취미가 있다.

이세민은 점과 획 그리고 근골의 뛰어남을 추구함에 자형의 성글음을 피하지 않았다.  <온천명>의 용필 특징은 허공에서 형세를 취해 곧바로 누르고 들어 침착통쾌하면서 매우 필력이 있다.  이 중에서 ‘漢, 勞, 嬰’자를 보면 누른 곳은 무겁게 누르고 드는 곳은 실같이 들었으니 이는 이른바 봄누에가 실을 뽑는 법이다.  붓마다 북과 꽹과리를 치는 것처럼 리듬이 명쾌하여 웅대하고 큰 지략을 갖추면서 마음이 활달한 황제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필력의 뛰어남을 위해 항상 자형의 성글음을 돌보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老, 窮, 長, 故’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일종의 천진난만한 정취가 있다.

역대로 비를 쓰는 서체는 모두 바른 서체인 전서, 예서, 해서였으나 이세민이 처음으로 행서를 비에다 썼으니 <온천명>이 그러한 예이다.  이는 이세민이 처음 창안한 것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공적이다.  그의 글씨를 보면 처음에는 뜻을 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서세를 매우 깊게 이해하고 독창성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논서(論書)』에서 “내가 공자로 있을 때 자주 적과 대항했는데 일단 정의를 위한 전쟁이 시작되자 곧 오랑캐의 난리를 평정할 수 있었다.  징과 북을 칠 때에는 반드시 지휘가 있어야 하며 적의 진형을 살펴 그들의 강약을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나의 약함으로 그들의 강함을 잠식했으며 나의 강한 것으로는 그들의 약함을 공격한다. 그리고 적이 나의 약한 곳을 공격하도록 하면서 도망갈 때에는 백 수십 보를 넘지 않게 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약한 곳을 공격하는데 반드시 그 진형을 돌파하여 뒤로부터 다시 공격하면 크게 이기지 아니할 수 없다.  많이 이러한 방법으로 승리는 했는데 이는 내가 그 이치를 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는 전장을 서세에 비유한 것으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른바 필진(筆陣)이라 하겠다.  <온천명>을 보면 비록 이런 의미를 갖추고 있지만 표현이 충분하지 않고 성숙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표현한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풍격과 표일하면서 붓을 들고 대는 것이 분명한 행서체는 확실히 이후 미불 서체 탄생의 기초를 이루었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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