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벼루가 뚫리도록
-우현 이재무전에 부쳐-
“한 끼의 맛있는 음식은 오직 그날 하루 배부르게 하나 혹시라도 한 번 보아 깨닫는다면 종신토록 행복할 것이다.(且一食之美, 惟飽其日, 儻一觀而悟, 則潤于終身.《六體書論》)” 서예가 아무리 어려워 그 끝을 알 수 없다 하여도 어느 순간 홀연히 미묘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평생토록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을 위해 추사는 열 개의 벼루를 뚫었을 것이고 소동파의 퇴필은 산처럼 쌓였을 것이며, 우현도 무쇠로 만든 벼루일지언정 구멍이 나도록 먹을 갈아왔을 것이다. 먹을 갈아 벼루를 뚫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그것도 무쇠로 만든 벼루를 말이다. 이 <磨穿鐵硯>은 자신을 향해 수없이 되뇌고 자신에게 부단히도 최면을 거는 의미이다.
당면한 서단의 현실은 불행하다. 서예의 주재료가 한자인데 그 한자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설령 한자를 알아도 훈음만을 읽어낼 뿐 그 문장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서예작품에 임하여 사람들이 문자를 모르면 이는 심각한 상황으로 연결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혹자는 작품의 글자수를 줄이고, 혹자는 미술적인 요소를 도입하며, 혹자는 전시장에 작품해석을 붙이기도 한다. 한문작품에 한글해석이 붙는 것을 보면 이 문제에 관한 작가의 심각한 현실인식이 드러난다.
우현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소헌 정도준 선생님을 만나 서예를 시작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가 되었고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서예청년작가전에 다섯 번이나 초대되었다는 것은 그의 글씨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경기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에서 「조지겸의 예술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니, 서론에서도 그는 분명 인정받은 작가이다. 따라서 여기선 세세한 말을 줄이고 몇몇 작품만을 골라 그 대강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圓滿寬平>은, 右下부분을 과감하게 비워두는 대신 흐릿한 풍경에 유인 하나를 찍었다. 이 글귀는 “이 마음이 늘 원만하면 저절로 결함이 없는 세상이 되고 이 마음이 늘 너그럽다면 저절로 험하고 치우친 감정이 없어지리라.(此心常看圓滿 自無缺陷之世界 此心常放得寬平 天下自無險側之人情)”라는 말에서 발췌한 듯하다. 작가는 한가롭고 평온한 분위기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것 같지만, 글씨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그리 평온하지 않다. 강하고 긴밀하고 직선적이고 거침없다. 오랜 세월 글씨에 전념했기에 드러나는 필세의 영향도 있지만 이는 작가의 성품이 게으르거나 느긋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자신에겐 치밀하면서도 상대에겐 너그럽고 안으로는 바르고 곧으면서 밖으로는 원만하고 평온함을 추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침산>이란 작품에서는 분위기가 다르다. 여기에서 작가는 직선을 사용하였지만 곡선적인 요소가 더욱 드러난다. 고요한 분위기 아기산새의 재잘거리는 기지개를 작가는 부드럽게 상큼하게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 산새라는 느낌과 아기 새의 기지개답지 않게 글자가 대담하고 웅장하다. 서예는 글자를 쓰는 것이요, 문장이란 사람의 생각을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정해진 글자를 예쁘게 인쇄하듯이 옮겨놓아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자신이 표현하려했던 의미를 생각하고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나에게 준비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에 머물 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는 예술 아마 그것은 죽은 것으로 진단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소리에 깊은 감정이 담겨있으면 말을 다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요, 단 한 방울의 눈물이나 단 한 차례의 스킨십에도 상대는 충분히 감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에서 몰입은 매우 중요하다. 그 속에 내가 있어야하고, 그 속에서 내가 절절하게 느껴야 한다. 공력이 있지만 마음이 없다면 신채가 생겨나지 않고, 마음이 있지만 공력이 없다면 신채가 실해지지 않는다.(有功無性, 神彩不生. 有性無功, 神彩不實.《翰林粹言》) 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安樂窩>라는 작품에서는 우현의 열정이 느껴진다. 붉은 계통의 강렬한 바탕에 곡선을 최대한 살려 다른 작품들보다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쓰려 했다. ‘窩’라는 글자를 보면 다 찌그러져가는 초가집이나 소박한 토굴이 연상된다. 좌우로 쓴 협서는 그와 반대로 바위를 부딪치며 거세게 흐르는 계곡물과 같다. 장법도 다른 곳보다 답답할 정도로 강하고 거칠다. 보통의 경우 여기서 힘을 빼고 강약을 섞어 편하게 썼을 것이지만 작가는 안락와를 강조하기 위해 이를 역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熱不必除 而除此熱惱 身常在淸凉臺上 窮不可遣 而遣此窮愁 心常居安樂窩中 (무더위가 반드시 없어지진 않지만 이 무더위에 괴로운 생각을 없애면 몸은 항시 서늘한 누대위에 있을 것이요, 궁핍함은 쫓아 버릴 수 없어도 궁핍을 근심하는 마음을 쫓아버리면 마음은 항시 안락한 집에 있으리라.)라는 내용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우현은 안락의 근원을 바쁘고 힘겹고 어려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나서, 마음을 비워두고 기다리며 찾는 것 같다. 연꽃처럼 청결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흙과 흙탕물 속에서 청아한 미소를 짓는 그런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태가 더욱 고귀해 보인다.
<禮敬>은 강렬하지 않으나 근엄하다. 비교적 평온한 노랑계통의 지면에 예경이란 글귀를 예서로 쓰고 그 아래에 한글흘림으로 해설을 하였는데 화면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안락와>와 같이 거세게 흐르는 계곡물이 아니라 잔잔하게 개천을 흐르는 물과 같다.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찾아가는 편안함이기보다는 늘 지킬 것은 지키면서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경건함이 엿보인다.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예의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대한다면 어찌 집안이 화목하지 않겠는가?
작가는 자상하고 감성적인 면이 많은 것 같다. <겨울비>를 보면 저절로 이러한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러한 글귀를 쓰려 했을까? 한 겨울 찬비가 내리는 속에 우산을 받쳐 든 두 사람이 있다. 연인일까? 아님 모자 부녀 조손간일까? 아무튼 추운 겨울날 차갑게 내리는 빗속에 꼭 붙어서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추운 겨울이고 싸늘히 내리는 빗속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어느 한 사람의 눈에는 많은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붉고 화려하게 핀 사르비아처럼 피어오른다. 이들에게 어찌 추운 생각이 있으랴?
이처럼 살아있는 글씨는 필획마다 힘이 드러나고 글자마다 모양을 달리하고 행마다 다른 운치를 내어 그 자연스러움을 지극하게 하니 이래야 법이 있는 글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획이 삐뚤어지면 다른 획들이 반응하고 다른 한 획이 바로 서면 그 외에 모든 것이 그를 따라 변화해야 한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그렇게 주변에 대하여 반응한다. 주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이는 죽어있는 것이요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점은 한 글자의 법을 이루고 한 글자는 이에 한 작품의 법이 된다. 다르지만 법에 어긋나지 않고 서로 어우러지지만 같지는 않아야 한다.
작가에 대해 나의 천박한 지식으로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오거서루 멤버들처럼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시각에서 자신의 글씨를 새로이 바라보고 새롭게 평가하려한다면 정체되지 않을 것이요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서단에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현선생의 작품전을 축하드리며…….
근사재에서 홍우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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