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溪暮泛
陶谷 洪愚基
花開昨夜雨(화개작야우)
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
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
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
어제 밤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떨어지네.
가련하다 어느 봄의 일이여
비바람 속에서 오고 가누나.
송한필(宋翰弼)의 <우음(偶吟)>이란 시이다. 송한필의 본관은 여산(礪山)이요, 자는 계응(季鷹)이며, 호는 운곡(雲谷)이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 1496-1575)은 1521년 자신의 처남인 정상(鄭瑺)과 함께 승정원에 모반사건을 고발한다. 자신의 외삼촌과 외사촌을 비롯한 그와 관련된 인물, 전좌의정 안당(安瑭) 안처겸(安處謙) 안처근(安處謹) 이정숙(李正叔) 등이었다. 이들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등이 조광조를 지지했던 자신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남곤과 심정 일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들의 대화를 들은 송사련이 남곤과 심정에게 아부하여 출세하기 위해 이를 관청에 일러바쳤던 것이다. 여러 명의 종친들이 거론되고 중종에 대한 폐립(廢立)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건은 역모(逆謀)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순흥안씨 집안인 안당과 세 아들은 사형당하고 집안은 멸문되었다. 안당의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였고 벼슬도 절충장군 시위대장 등 당상관으로 종신토록 지내면서 녹을 받았다. 훗날 이 사건을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부른다. 1575년에 송사련이 사망하였고 그 해에 신사무옥의 전모가 밝혀졌다. 1586년에는 그때까지 숨어살던 안당의 증손자인 안로(安璐)의 처 윤씨(尹氏)가 신원 상소를 올렸다. 죽은 안당과 세 아들, 손자들이 모두 복권되었고 안당에게는 '정민'(貞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당시 사대부들과 세인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한 비난을 하였다. 결국 무덤은 파헤쳐졌고 황해도에 모여 살던 송익필 일가 70여 명은 뿔뿔이 흩어졌다.
운곡의 시 <우음(偶吟)>은 ‘가련(可憐)’이라는 한 마디에 모든 시상이 압축된다. 꽃은 시인 자신을 암시하고 비바람은 그 시대의 권세(權勢)와 민심을 상징한다. 권세가 지나가면 무수한 선비들이 떨어지고 권세가 몰려오면 다시 무수한 선비들이 등장하니, 바로 어제 밤비에 꽃이 피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는 그런 모습과 같이 보였을 것이다. 필자 역시 이 시를 처음 대하며 단순히 봄에 지나가는 한 아름답고 안타까운 풍경을 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꽃이 떨어지고 꽃이 피어나는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시를 들여다보면 시어(詩語) 하나하나에 이렇게 시인의 애환(哀歡)이 녹아있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시는, 송사련의 4남 인필(仁弼) 부필(富弼) 익필(翼弼) 한필(翰弼) 중 셋째 익필의 <남계모범(南溪暮泛)>이다.
迷花歸棹晩(미화귀도만)
待月下灘遲(대월하탄지)
醉裏猶垂釣(취리유수조)
舟移夢不移(주이몽불이)
꽃에 취해 돌아갈 배 늦어져갔고
달 기다려 더디 여울 내려온다네.
술에 취해 낚시 줄을 드리웠더니
배는 떠가나 꿈은 떠나지 않누나.
이 시는 평기식 오언절구로 遲 移를 韻으로 사용한다. 사방이 꽃으로 만발한 춘삼월 호시절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있노라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시간이 제법 흘러 어느새 밤이 되었다. 밤에 배를 타고 여울을 내려와야 하니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을 기다리다 떠오른 달에 취해 또 한참을 머물렀다. 낮에는 꽃을 보았고 밤에는 달을 맞았으니 이런 상황에 어찌 술 한 잔이 없을까? 기분 좋게 술에 취해 낚시질을 하니 이 또한 물고기를 잡기 위한 일이겠는가? 배는 물결 따라 흘러가고 꿈과 마음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른다.
하지만 결구(結句) 舟移夢不移에서 역시 넷째 운곡의 <우음(偶吟)>이 연상된다. 이런저런 사건이 터지며 피비린내 나는 세월은 흘러가고 역사는 기록되었지만, 송익필은 문학과 예학 성리학에서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인 예학(禮學)의 태두인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김반(金槃) 부자 및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金瑬) 등을 문하에서 길러냈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이 그의 절친한 벗이었다. 이처럼 좋은 친구 훌륭한 제자들을 만났으니 부친이 돌아가고 안당의 신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풍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권력의 향기에 취하고 눈멀어 세상이 어두워진 것도 몰랐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 자신의 처지도 달라졌지만 내 꿈 내 마음은 그 아름다운 추억에 머물러 있음이리라.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자(字)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峰) 또는 현승(玄繩)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하지만 그는 출생문제와 신사무옥으로 인해 세간의 비난을 받았으므로,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환천(還賤)의 고난을 당했음에도 제자 김장생의 숙부인 김은휘를 비롯한 김진려 등이 돌봐주었으므로, 만년에는 충청도 당진에서 살았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문인들과 젊은 학도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가 1910년 다시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송익필의 <천(天)>이란 시는 특이하다. 대부분의 시가 글자의 반복을 싫어하는데 여기서는 20구 100자 중에 天이라는 글자가 무려 18번이나 반복된다.
君子與小人 군자와 소인은
所戴惟此天 오직 이 하늘을 이고 사나
君子又君子 군자는 또 군자의 하늘이니
萬古同一天 만고에 똑같은 하늘이라네.
小人千萬天 소인은 천만 하늘이 있어
一一私其天 하나하나 그 하늘 사사롭구나.
欲私竟不得 사사롭게 하려다 마침내 얻지 못하고
反欲欺其天 오히려 그 하늘을 속이려 하지.
欺天天不欺 하늘을 속이나 하늘은 속지 않으니
仰天還怨天 하늘을 우러르다 다시금 원망하지.
無心君子天 사심 없음이 군자의 하늘이고
至公君子天 지극히 공평함도 군자의 하늘이라.
窮不失其天 곤궁해도 하늘을 잃지 않고
達不違其天 현달해도 그 하늘을 어기지 않네.
斯須不離天 잠시라도 하늘을 떠나지 않으니
所以能事天 하늘을 섬길 수 있음이라.
聽之又敬之 듣고 또 공경하여
生死惟其天 살건 죽건 오직 그 하늘이니
旣能樂我天 이미 나의 하늘을 즐길 수 있다면
與人同樂天 남들과 함께 하늘을 즐기리라.
이 시를 감상하다보면 오히려 경전을 대하는 듯하다. 옳고 바른 것을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군자와 눈앞에 이익만을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소인을 가려 설명하고 있다. 소인은 당면한 이익만을 따지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잃고 결국 외로워지지만, 군자는 어려움에 처하거나 가난해도 늘 만족할 줄 아니 외롭지 않다. 德不孤必有隣이라 하지 않던가? 사심없이 하늘을 즐기고 공경하며 살아가니 많은 사람들과 그 하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익필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시를 보면 이처럼 철학적인 내용이 강하게 드러난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겐 신비로운 행적이 많이 전해진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지만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음의 두 편 정도만 소개한다. 아마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과 명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전란을 겪으면서 만주족과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무너졌던 조선민초들의 자존과 삶의 고통을 시원하게 되갚아줄 이율곡 사명대사 서산대사 송구봉과 같은 위인을 조선의 백성들은 찾고 있었을 것이다.
좌우간, 시문과 필법이 뛰어났던 홍가신(洪可臣)이 송익필과 가까이 지냈는데, 동생 홍경신(洪慶臣)은 형이 서얼 출신인 송익필에게 경대(敬待)하는 것을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형에게 “어찌하여 송익필과 벗을 하십니까? 내가 반드시 욕을 보여주겠습니다.”하였다. 이에 홍가신이 웃으면서 “송구봉 선생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비록 사비(私碑)의 소생이라고 하나, 그 학식과 인품은 존경할 만한 분이니라. 네가 그렇게 해보고 싶거든 한번 해 보아라. 그러나 너는 반드시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홍경신은 송익필이 자신의 집에 이르는 것을 보고서도 욕을 보이기는커녕 뜰에 내려가 맞으며 절을 하였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홍가신이 까닭을 물었더니 그 아우 말이 “내가 절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부터 홍경신도 형과 더불어 구봉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한다.
또 다른 이야기다. 하루는 이율곡이 찾아 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그림을 그렸는데 잠자리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송구봉이 말했다. “안될 말일세. 사람을 얼마나 죽이려고.” 그러자 율곡이 다른 그림을 그리는데 이번에는 지네였다. “그것도 너무 일러. 아직 때가 아닐세.” 마지막으로 거북을 그리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건 가능하겠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들어 진 것이 거북선이요, 잠자리는 헬리콥터 지네는 장갑차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이러한 것들을 어찌 알았을까? 이는 율곡이나 구봉이 도통한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미리 먼 훗날을 정확히 내다보고 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말이다.
'서론과 글감 > 도곡논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遊智異山 - 도곡 홍우기 (0) | 2016.08.26 |
---|---|
偶題 - 도곡 홍우기 (0) | 2016.08.26 |
題鄭府尹山水屛 -도곡 홍우기 (0) | 2016.08.26 |
遊貴州有感 (0) | 2015.07.24 |
遊邊山 (0) | 2015.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