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길을 걸으며
효천(曉泉) 김은숙(金銀淑)의 고향은 경북 울진이나, 서예를 시작한 것은, 경남 창원에 직장을 정하고 노석(露石) 이병남(李炳南) 선생을 만나면서였다. 결혼한 뒤 남편의 직장을 따라 경주로 이사하고, 다시 경기도로 올라오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으니 이제 서예는 효천의 취미요 예술이요 삶 자체가 되었다.
효천(曉泉)이란 호는, 은숙(銀淑)이란 이름과 연관된다. 은(銀)과 숙(淑)에서 고귀(高貴)하고 정결(淨潔)한 이미지가 떠오르니, 효천 역시 고요하고 유익하며 정결한 의미를 생각했다. 밤이 되면 하루종일 시끄러웠던 모두가 잠들고 가라앉아 고요해진다. 효(曉)는 그러한 상태에서 천천히 밝아오는 하루 중 가장 맑고 고요한 시간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도 물이고,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내나 강(江)도 물이며, 강하(江河)가 모여 거대해진 바다도 물이다. 샘[泉] 역시 땅속 깊이 스며들어 온갖 부정한 것들이 걸러진 뒤 솟아나는 정화된 상태의 물이다. 샘물은 창작(創作)의 창(創)과 의미가 통한다. 창이란 나무를 쪼갰을 때 나타나는 색을 보고 만든 글자이다. 도끼로 나무를 쪼개면 그때 드러나는 신선한 색깔이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음을 시골에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새롭고 신선했더라도 조금 있으면 퇴색하니 창작이라 함은 늘 새롭고 신선해서 퇴색된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샘물 역시 솟아나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정결하니, 예술가로서의 효천은 아름답고 새로운 작품을 무한히 만들어내는 작가가 되길 주문한 것이다.
그에 부합하듯 효천은 부단하게 노력하는 작가이다. 일단 초대작가가 되면 대부분이 졸업했다는 생각으로 방심하게 되는데, 효천은 이만하면 되지 않으냐는 말을 해도 자신의 맘에 들 때까지 연습을 계속하고, 마감일이 되어서야 끝을 맺는다. 물론 평소에도 부지런히 법첩을 익히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질문하며, 틈나는 대로 좋은 작품이 있는 전시장을 찾아 영감(靈感)을 얻는다. 처음에 평범했던 작품도 나중에는 사뭇 다른 차원의 작품으로 만들어 내니, 타고난 재주도 있을 것이나 모두가 노력과 열정으로 얻어진 것이다.
효천의 수수함은 또 하나의 장점이다.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니 사람들은 이를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한다. 그러니 글씨를 잘 쓰려면 먼저 좋은 법첩을 찾아 임모해야 함은 물론, 많은 책을 읽고 풍부한 경험을 하며 힘써 품성(品性)을 도야(陶冶)한 뒤에 좋은 글씨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글씨와 품성은 상호 보완(補完)되는 것이다. 효천이 글씨 쓰는 모습을 본 사람은 붓대에 먹물이 묻어있고 화선지 역시 대충 잘라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을 꾸미거나 다듬으려 하지 않으니 그 글씨에 수수함이 그대로 녹아드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거의 모든 작품을 채근담(菜根譚)에서 골랐다. 작품으로 하기 좋은 시가(詩歌)들이나 여러 가지 경전(經典) 명구(名句)가 있지만, 그중에 굳이 채근담을 택한 것은 효천의 생각이 이 책과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채근담은 유교(儒敎)를 중심으로 하고 노장(老莊)과 불교사상(佛敎思想)까지 폭넓게 흡수하여 저술한 책이다. 채근이란 나물이나 뿌리처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떳떳하게 산다는 뜻으로,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백사(百事)를 이룰 수 있다.[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효천의 서예를 이해하기 위해 작품 한 점을 소개한다.
앞을 다투는 길은 좁으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절로 한 걸음이 넓어지고, 진하고 좋은 맛은 짧으니 일분(一分)을 맑고 담박(淡泊)하게 하면 절로 일분(一分)이 유장(悠長)해진다.[爭先的經路窄 退後一步 自寬平一步 濃豔的滋味短 清淡一分 自悠長一分]
요즘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여기에는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설탕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오징어게임 등 어렸을 때 재미있게 놀았던 단순한 게임이 등장한다. 이를 보며 우리는 각박한 현실을 연상한다. 게임이 시작되면 죽은 사람만큼 1억씩 상금이 올라가고, 끝까지 살아남으면 참가자 수만큼 456억을 벌 수 있다. 어찌 보면 일정한 규칙을 정해놓고 벌이는 공정한 놀이지만, 게임에 지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간의 돈을 지불하는 자본가와, 가진 것이 없으니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궁지에 몰린 참가자와의 공정할 수 없는 게임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궁핍한 참가자는 돈 앞에 게임을 포기할 수도 없다. 후일, 오징어게임을 만든 오일남은 상금을 탄 성기훈에게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자본주의(資本主義) 세상사(世上事)가 이와 같지 않은가?
그러나 효천의 이 작품은 반대의 삶을 지향한다. 좁은 길에서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니 얼마나 여유로운가? 상대방을 죽이고 넘어뜨려야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험악한 세상에서 먼저 물러서는 여유를 보여주고 초연하게 살아가려는 수수한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지 않은가? 좁은 길이라고 쓴 본문이나 그를 설명하고 있는 협서 모두가 깔끔하게 정제된 글씨가 아니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강렬한 선이 고저(高低) 장단(長短) 강유(剛柔) 윤갈(潤渴) 기정(奇正) 지속(遲速) 조세(粗細) 경중(輕重)으로 어우러진다. 내려쓴 세로줄도 굳이 맞추려 하지도 않으니 제멋대로 살아가나 규범(規範)이 있고 평범한 듯 살아가나 비범(非凡)한 자연인의 모습과 같다.
이번은 효천의 첫 번째 전시이니 자신에겐 언제까지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첫 문을 통과하고 나면 다음 문을 열어야 할 것이고 다시 다른 차원의 문을 두드려야할 것이다. 이렇게 나아가다보면 효천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열어가겠지만, 처음 문을 여는 그 설렘만큼은 오래도록 유지했으면 한다. 그리고 세상에 오래도록 남을 아름다운 작품의 작가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신축년 깊은 가을에 도곡 홍우기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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