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흥선 대원군의 결묵연

향수산인 2009. 6. 12. 13:19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성명은 이하응(李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父는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다. 그는 후사(後嗣)가 없는 철종의 유고시를 대비하여 조대비(趙大妃)와 가까이 지내면서도, 세도정치를 하고 있는 안동김씨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았다. 1863년 철종이 죽자, 마침내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의 아명)이 왕위에 오르면서, 조대비에게 섭정을 위임받게 된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흥선대원군의 ‘결묵연(結墨緣)’은 가로 89cm 세로24.5cm의 작품이다. 거칠고 강한 필세, 대담하지만 치밀한 운필, 특이하면서도 재치있는 결구가 대원군의 의지와 성격, 그리고 당시의 심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우선 結은 실사변이 특이하여 위쪽에서 墨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고, 緣에서도 역시 중간의 墨을 향해 머리를 열어놓고 있다. 앞의 것은 糸와 吉이 서로 편안하게 어우러졌고, 뒤의 것은 糸가 彖에게 많이 양보하고 있는 형상이다.


 


墨은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걸터 앉아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가운데의 火는 시원하게 좌우로 뻗어 내린다. 보통의 경우라면 黑의 아래 획을 파임으로 길게 처리하고 그 아래에 점들은 몰아넣는데 석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좌우의 글자에서 보이는 점들과의 반복을 피해 좌우로 길게 내뻗고, 이것이 불화임을 내세우기라도 하듯 두 개의 등불을 선반위에 올려놓았다. 아래의 土를 짧게 한 것은 가로획들과의 중첩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緣에서도 역시 위와 아래를 큰 부류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애써 연결하는 모습이다. 彖의 중간 두 삐침은 지나치게 길고 아래의 두 획은 너무나도 얄밉도록 짧은데, 위의 두 획을 혼자서 감당하기라도 하듯 아쉬운 부분을 마무리하며 파임이 시원하고 힘차게 중앙으로 내달린다. 이는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억눌렀다가 장쾌하게 펼쳐내는 드라마틱한 기술이다.
이 작품은 墨을 중심에 놓고 좌우가 묵을 향해 집중된다. 밖으로 향하는 필획은 극도로 축소하고 중앙으로 향하는 필획은 크게 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위아래를 강하게 처리하고 중간부분을 약화시키면서 상하의 강한 결속을 강조한다. 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백성들의 생활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중간에서 왕의 권력을 가로채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들을 약화시키며, 백성들과 군주가 커다란 존재가 되어 충성과 의리를 지켜나가는 굳은 결속을 대원군은 보고 싶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먹은 검은색일 뿐이요 종이는 흰색일 뿐이지만, 붓이 지면을 스치는 찰나 간에 강약(强弱)․질삽(疾澁)․윤갈(潤渴)․강유(剛柔)․대소(大小)․방원(方圓)․조세(粗細)․장단(長短)․향배(向背)․평험(平險) 등등의 천만가지 형상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속에 작가의 학문이 담기고 작가의 생각이 담기고 작가의 혼이 담기는 것이다. 청의 서예가요 서론가였던 유희재 역시 이렇게 말한다. “서는 같은 것이다. 그 학문과 같고 그 재주와 같고 그 뜻과 같으니 종합해서 말한다면 그 사람과 같을 따름이다.(書如也 如其學 如其才 如其志 總之曰 如其人而已)” 대원군의 글씨에서는 부드러운 느낌의 강함보다는 세찬 느낌의 강함이 드러난다.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세도가들 틈에서 왕권을 강화시키려했던 대원군, 그리고 자신의 거대한 꿈을 숨기기 위해 난행을 일삼고 온갖 굴욕을 참아왔던 그의 강한 의지가 뚜렷이 보이는 그런 글씨이다.
결묵연! 수천 년을 지나도 언제나 변함없는 먹, 흰 화선지에 검은 획을 그어가는 모습은 어쩌면 눈 덮인 세상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는 우리의 인생이다.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요, 다시 할 수 없는 것이요, 지극히 소중한 것이다. 먹과의 인연은 화려하거나 달콤하지 않다. 그러나 글을 쓰는 동안에 고매한 선현들을 만나고 그들의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되며 뭉클한 감동이 밀려온다.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머릿속이 복잡하더라도 서예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몰입의 깊은 경지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에, 묵향에 빠졌던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도곡 홍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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