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사는 828년경에 인도승려인 덕운(德雲)선사가 창건한 절이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당시에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었고,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까지 발전하였으나, 임진왜란 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1679년에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천은사로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한 스님이 잡아 죽였는데 그 이후로 샘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천은사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붙여졌던 것인데, 그 뒤로 이상하게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에 그 화가 미친것이라고 하였다.
얼마 뒤 이광사가 이곳에 들렀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도판과 같이 ‘智異山泉隱寺’라 써주면서 이것을 일주문에 현판으로 걸면 다시는 화재가 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도 그렇게 하고보니 신기하게도 이후로 화재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소론집안에서 태어나 당쟁에 휘말려 벼슬도 하지 못한 채 23년의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거기서 한 많은 생을 마쳤던 사람이다. 이 현판을 가만히 살펴보면, 원교가 왜 그렇게 조선의 4대명필의 한사람으로까지 사람들에게 칭송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智의 人은 아래 大를 사모하는 듯 눈길을 떼지 않고 아래 大는 위의 人을 그리워하는 듯 가는 목을 빼고 있다. 하지만 원교는 짓궂게도 인과 대를 멀리 떨어뜨려 서로를 더욱 애처롭게 하고 있다. 異의 첫 획은 智에서 내려오는 흐름을 받아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뱀이 바위틈에서 스르르 기어 나와 서로 뒤엉켜 있는 것처럼 안으로부터 기필을 하고 있다. 田아래에 있는 좌우 十을 보면 좌측에서는 위쪽의 田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우측 것은 아래에 있는 가로획과 어우러져 휘감아 돈다. 절묘한 착상이다. 아래에 위치한 점 역시 안정감있게 크게 벌렸지만 안쪽을 향해 필획을 감아올리고 있다. 山은 괴기할 정도이다. 중심 획이 높은 산위에서 폭포수처럼 장쾌하게 바위웅덩이로 떨어져 내린다. 泉 또한 익살스럽다. 白의 세 번째 획은 첫 획의 삐침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각도를 달리하는데 이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올리고 있다. 水의 좌측삐침은 더 이상 가기도 귀찮다는 듯이 가는 시늉만을 하다가 다음 획과 연결을 꾀하였고 마지막 파책부분은 계곡물처럼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다음의 隱은 다른 글자에 비해 너무나 안정적이다. 모든 것을 꼭꼭 숨겨놓은 듯 치밀하게 획을 쌓아놓았고 세상사에 전혀 동요되지 않을 듯 차분하다. 寺를 보면 가로획이 隱의 죄측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앞으로 심하게 숙여져 있다. 이는 우측 山에서 보여지는 세로획과의 조화를 위한 것이다. 참으로 절묘하다.
이 현판은 가로90cm 세로114cm의 크기로 전술한 것처럼 천은사 일주문에 현판으로 걸려있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문이다. 이 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 하는데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대부분이 다포식으로 지어져 화려하며, 이곳처럼 문이 하나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성문 벽지불 보살을 상징하는 세 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좌우간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 일심(一心)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천은사 일주문 아래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현판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믿거나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