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韻이 演出한 신나는 律動美, 寒泉 梁相哲의 현대성 글씨
1. 서언에
작품을 통하여 남을 감동시킨다고 하는 것은 모든 작가들이 바라고 있는 일관된 희망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아닌 작품만으로 상대를 감동시킨다고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보는 사람의 교양과 인격의 차이에서 생길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실로 다양한 인격체가 모인 자리에서 모두 가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이야말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1월28일 물파아트센터(디렉터 손병철)에서 펼쳐진 한천(寒泉) 梁相哲의 전시에서 느끼된 일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어떻게 서예를 공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하게 소개된 바가 없지만, 지금까지 일련의 작품에서 심상치 않은 운필의 기운을 느끼게 된 것은 지난 몇 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등장한 초서전을 통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일반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었던 것은 그의 筆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운의 긍정적인 요동에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건축학을 전공한 건축설계사이다. 서예와는 거의 무관한 공부를 한 그가 이처럼 감상자들의 심금을 한방에 쥐어흔든 것은 일찍이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하다.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서 현실적으로 그의 서사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전통과 현대를 고르게 꿰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전통에 있어서는 거의 섭렵하고 있었다. 더욱이 초소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자유분방하다. 그것은 王鐸의 초서를 부분적으로 사숙하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충분히 찾아질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말은 지금의 여느 작가들처럼 선생의 어줍지도 않는 체본에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경우와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려대고 싶은 것은 언제 어디서나 거침없이 휘갈겨 댄다. 글씨를 쓴다는 맛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경우이다. 그의 글씨는 어떤 경우라도 부담 없이 다가선다. 다만 그는 경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을 나타내는 것을 잊지 않는 경우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천의 예술마당에 들어서 보기로 한다.
2. 소재의 다양성
대개의 서예가들은 작품서사에 임하게 되면 무엇을 쓸 것인가에 지극히 큰 고민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형상으로 인하여 인지하게 되는 이미지 전달이 가장 앞서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경우의 작가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용으로 전개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형상적인 맛으로 우선 다가서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구사하는 작품이 특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내용과 형태가 어우러진 조화로운 재미가 진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위기의 연출은 건축학을 전공한 작가로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의 작품에서는 인위적인 계산방법이 강하지 않게 부분적으로 들어 나 있다. 이는 마치 건축설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작품을 감상하는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며, 구체적인 간단한 설명을 하자면 바로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을 배치하고 있음에서 느끼게 되는 분위기라고 할 수가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을 보고 한국화가 윤상(강행원)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즉석에서 "양 선생은 글씨를 집 짓듯이 썻네요?"였다. 이 경우 윤산 선생의 발언은 필자와 서로간의 어떤 의견개진도 없이 불쑥 아온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만큼 한천의 작품에서는 앞에서 적은 작가의 직업적인 분위기도 은근히 묻어나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싥제로 그가 서사한 모든 작품에서 남과 다른 그의 독창성이 강하게 노출되고 있었다는 것의 직접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제주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강조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주의 이미지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냐 싶을 정도이다. 그것은 작품에 나타난 濟州의 회화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별스럽게 제주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을 한다면 작품제작에 대한 배경의 조건이 어떤 것이었나는 예외로 하고라도, 작가의 조형의지가 제주라고 하는 지역적인 맛의 강조가 전반적으로 고르게 베어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통해서 그의 서예가 보여주는 예술정신의 형상이 나름의 독자성을 이미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선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보통의 경우 등장이 쉽지않은 재료의 특수한 경우를 함께 들추어낼 수가 있다. 예컨데 나무판대기의 등장은 다른 경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동원하고 있는 나무재로는 이왕의 경우와는 약간 달랐다. 그것은 제주도에서 쓰다버린 조각배의 파편들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사진재료인 인화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글씨를 쓰는 것은 화선지를 떠올리게 되어있지만, 그는 인화지를 서사에 동원한다는 기발한 생각을 해 낸 것이다.
그 인화지에는 唐代의 명문장가인 王鐸을 능가(?)하는 초서가 거침없이 휘갈겨져있다. 그 서사의 필순을 따라서 쓰여진 흔적을 읽어보면 글씨를 쓰는 작가의 심상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다. 대개의 경우 서사를 함에 있어서 완급의 조율에 따라 묵색의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완급의 조율이 지니고 있는 맛의 형상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 완급의 조율에 의하여 발생하는 운필의 리듬을 읽을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의 변화가 赤裸裸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부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는 솜씨의 비밀스러운 부분의 직접적인 공개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운필의 기운에 따라서 일어나는 작가의 호흡도 포함이 된다. 대개의 경우 쉽게 호흡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그것을 형상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한천은 그 어려운 형상변이의 구체적인 설명을 한 작품을 통하여 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서사능력을 짐작해야 한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두려움을 모르는 자신감의 형상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것도 있다. 그것은 쇠붙이의 등장이다. 언뜻 보기에는 주물로 錯視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주물이 아니고 용접기의 동원에 의해서 생겨난 조형이었다. 두꺼운 철판을 용접기로 오려낸 것을 목판 등에 붙인 것이 서예로 둔갑하여 모습을 뽐내고 있다. 이는 글씨를 쓴다는 개념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만 그렇게 사용된 오브제를 통해서도 그의 서사분위기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 또한 조형능력 그 자체이다. 심지어는 용접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도 같은 작품에 동원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동원된 것이 의미가 통하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 있다. 이미지의 전달을 위한 것으로는 목판의 문양을 자연스럽게 한라산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언뜻 무늬가 분명한 나무여서 분간이 어렵지만 작가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벚나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하여 제주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염두에 두고 우리민족의 자존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제주의 시커먼 화산암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것은 제주의 힘이요 제주의 근원이다.
어느 것도 제주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돌가루에 섞은 안료와 용접기의 가스만 다른 곳에서 수입한 것이다. 거기에는 제주의 명물인 갈옷의 무명원단을 동원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표구에 사용된 액자의 재료인 목재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신을 전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읽어질 수 있도록 안배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작가로서 작품에 대한 관리능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한 부분을 통하여 건축공사장의 감수방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생각하건대 서예를 하는데 건축현장에서나 살펴질 수 있는 재료가 서예의 한 가운데 들어와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의 서사능력을 이루고 있는 氣韻이 있었기 때문이다.
氣韻. 이야말로 서예가라면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신비의 현상이다. 한천은 그것이 서예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이는 마치 水道栓을 통해 끌어들인 물을 사용 후에 어떻게 배수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의 건축설계와 전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문자의 형상을 배치하는 것도 그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실로 종합적인 문자놀이의 현장을 그대로 벌여놓고 있는 것이라 해도 전혀 잘못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 단순한 문자나열의 서예와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더욱 강한 인상을 받게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와 같은 비슷한 방법의 현대서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하여 다른 작가와 같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생각한 전통의 이해에 따른 현대서의 구체적인 전개의 방법과 아울러 재료의 사용을 나름의 독자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연출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으로 이해를 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서사한 일련의 작품들은 상태가 다르고 내용이 다르지만 현장에서는 하나로 융화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그의 서예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전통의 이해를 통하여 새로운 현대의 탄생을 그야말로 바르게 안내하고 있는 한천의 작품을 두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부지기수이다.
3. 書態의 混在
이번의 전시회에 등장한 작품을 두고 살피건대 그가 접근하고 있는 서예는 형상의 다양화가 우선하고 있다.
서체추상, 제주풍물, 문자여행 등으로 작품의 안내를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해도 별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풀어본다면 우선 서체는 등장부터가 추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며 제주풍물은 작가의 출신지를 강조한 것임이고, 문자여행은 서체추상과 구체적인 變異現像을 읽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가운데 제주풍물은 관심을 끈다. 사용하는 재료가 그러하며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濟州라는 단어와 漢拏山의 이미지가 강하게 접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천의 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조형언어가 무엇보다 강한 지역적인 맛을 곁들인 개성으로 나타나있다는 부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글씨는 누가 쓰던지 간에 의미전달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왕의 현대서예에서 확인이 된 것이지만 文字를 통하기보다는 형상을 통하여 작품의 내용을 짐작하게 방법의 동원, 다시 말한다면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 알게 한다는 이미지 전환이 확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대개의 작가들은 노리고 있다. 그것을 한천의 경우 거의 유감없이 소화를 해 냈다는 것이다.
4. 마치며
전시 현장에서 들은 말이다. 그것은 어느 元老書家가 책임 있는 평론을 언급했다. 그러나 평론의 책임론은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어떤 평론이든 작품의 객관적인 평가를 절대 우선으로 하는 것은 상식 밖의 상식이다. 그러한 요구는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제시하는 훌륭한 작품이 있음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며, 객관적인 평가에 의한 事後結果인 것을 사전에 요구하는 것은 深思熟考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작가가 노리고 있는 작품의 정도만큼이나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도 노리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훌륭한 작품은 반드시 인상에 남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호평을 기대해서 작품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보다는 작가의 소신에 따라서 제작된 작품이 어느 정도 객관성을 확보하느냐 가 궁극적인 관건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한천의 한 판 신나는 붓 놀이는 이 즈음에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運筆은 制限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이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의 욕구에 의하여 쓰고 싶은데로 썼을 뿐이다. 그것이 기운으로 화하고 드디어는 형태의 근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는 감상자들의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읽는 쪽에서 감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순리이다. 모든 서예가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왕희지고 언제까지나 이백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서 다시 확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운이 연출한 신나는 한 판의 율동미를 우리는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긍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가 설계한 건축의 맛이 함께 느껴지는 글씨예술, 과연 재미를 느끼면서 서사를 한 것이라 어떤 언어로도 그 재미(?)를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다음의 七絶 한 수로 寒泉이 지니고 있는 예술에 대한 종합적인 안내가 되었으면 한다.
漢拏精氣一堂優, 現代造形不問遊,
鐵木石材無選別, 寒泉藝術海東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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