夢魂
陶谷 洪愚基
有約來何晩(유약래하만) 온다고 해놓고 왜 이리 늦는가?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정원의 매화는 지려고 하는데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갑자기 나무 위 까치소리 듣고는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리네.
내가 이옥봉(李玉峰)의 작품을 처음으로 대한 것은 이 <규정(閨情)>이란 시였다. 봄이 오면 낭군이 온다고 약속을 했나보다. 그래서 그녀는 정원의 매화가 필 때만 겨우내 기다렸을 게다. 그러다가 매화가 하나둘 피고, 시간이 또 흘러 가지마다 가득 꽃이 피어나고, 다시 더 시간이 흘러 꽃이 지려고 하는데도 낭군이 온다는 소식도 없다. 갑자기 집 앞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서 까치가 울어댄다. 혹시라도 낭군이 오시려는가 하는 생각에 거울 앞에 앉아 눈썹을 그리지만 역시 오지 않으니 부질없는 짓이다. 허화(虛畵)라는 시어(詩語)를 봐도 얼마나 많이 이 부질없는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옥봉(李玉峰)의 본관은 전주로 본명은 숙원이며 호가 옥봉이다. 옥봉은 16세기 후반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과 詩를 배웠는데 글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조원이라는 조선 제일의 문장가를 만나 연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옥봉의 마음을 안 이봉은 조원을 찾아가 딸을 첩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지만, 조원은 거절했다. 이봉은 다시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李俊民)에게 도움을 청했다. 결국 이준민의 주선으로 옥봉은 조원의 소실이 된다. 자기 딸을 첩으로 들여 달라고 사위 될 사람의 장인에게 청을 하고, 장인은 자기 딸의 시앗을 추천한 것이니 참으로 기괴한 일이다.
첩(妾)은 일반적으로 그 신분이 양인(良人)일지라도 가난하거나 미천한 여자를 뜻하는데, 신분이 양민이면 양첩(良妾), 천민이면 천첩(賤妾)이라 하고, 기생이면 기첩(妓妾), 종의 신분이면 비첩(婢妾)이라 한다. 또 아버지의 첩으로서 자식이 없으면 부첩(父妾), 자식이 있으면 서모(庶母)라 하고, 할아버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조첩(祖妾)·서조모(庶祖母)라고 한다.
조원(趙瑗, 1544-1595)의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자는 백옥(伯玉)이며 호는 운강(雲江)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19)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572년(선조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93년에는 승지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독서강의(讀書講疑)』가 있고, 유고로 『가림세고(嘉林世稿)』가 있다. 조원이 지은 <강행(江行)>이란 시를 보자.
江上誰家碧玉欄(강상수가벽옥난) 강가 누구의 집인가 벽옥 난간에
美人春恨鎖眉端(미인춘한쇄미단) 미인의 봄 시름 눈썹 끝에 걸려있네
低頭欲共仙郞語(저두욕공선랑어) 머리 숙여 선골 낭군과 얘기하려 하지만
無賴輕舟下急湍(무뢰경주하급단) 풀려있는 가벼운 배 급히 여울 떠나간다.
조원은 옥봉의 문재(文才)를 알았으므로 삼척부사 등 외직에 나갔을 때 옥봉을 데리고 다녔다. 문사들과의 모임에도 동반(同伴)하면서 시를 짓게 하였으니, 이로 해서 옥봉의 문명은 날로 높아졌고 명나라에게까지 알려졌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여류시인이었다.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집 아낙네가 옥봉을 찾아와 산지기인 남편이 소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잡혀갔는데, 편지 한 장 써 주면 풀려날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아낙을 불쌍히 여긴 옥봉은 남편 대신 파주목사에게 <위인송원(爲人訟寃)>이란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대야를 거울삼아 얼굴을 씻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물을 기름삼아 머리를 빗지만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니니
郎豈是牽牛(낭기시견우) 사내가 어찌 견우가 되리까.
거울이 없어 세숫대야에 고인 물을 거울삼아 얼굴을 씻고 기름이 없어 물을 기름삼아 머리를 빗는 가난한 처지이지만 그 아낙이 직녀가 아니니 사내가 소를 끌어간 견우일 리 없다는 시이다. 형조의 관헌은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 누가 써주었느냐고 물었다. 아낙이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그 관헌은 사내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소매에 그 시를 넣어가지고 와서 조원에게 보여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관원이 돌아가자 조원은 옥봉을 불러 그 행실을 크게 꾸짖고는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옥봉은 울며 사죄를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고 그 후 조원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옥봉은 남편 조원을 그리워한다. <몽혼(夢魂)>이란 시가 바로 이것이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근래에 안부하니 어떻게 지내셔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 비친 비단 창에 첩의 한 사무치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꿈속에 다녀간 자취라도 남았다면
門前石路半成砂(문전석로반성사) 문 앞 돌길 반쯤은 모래가 되었으리.
이 시는 평기식 칠언절구로 何 多 砂를 시운으로 쓰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시다. 읽는 즉시에 그 간절함이 마음으로 사무쳐 온다. 근래에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관사(官事)에 복잡한 일은 없었나요? 몸은 강녕하신지요?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 혹시라도 제 생각은 나지 않으셨나요? 궁금한 것이 많다. 달이 떠오르면 더욱 조원이 그리워진다. 달도 밝은데 혹여나 오늘은 나를 찾지나 않을까?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던가? 매일 밤 창문에 기대서서 낭군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기다려도 낭군은 오지 않는다.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러다가 지쳐 잠이 들었을 게다. 그러고도 못 잊어 다시 꿈을 꾼다. 얼마나 많이 찾아갔으면 그 앞을 서성거렸으면 문 앞에 있는 돌길이 반쯤은 모래로 변했을 것이라는 시어를 찾아냈을까?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자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질투를 느끼든가 존경을 하게 된다. 아마 이옥봉은 조원의 문학적인 매력에 깊이 빠져 그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율곡이 생원시에 장원을 했을 때 조원은 진사시에 장원을 한 사람이었으니 그의 문장을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사랑시는 간절하고, 정열적이고, 슬픔이 가득 차 있다.
平生離恨成身病(평생리한성신병) 평생동안 이별의 한(恨) 몸의 병이 되었으니
酒不能療藥不治(주부능료약부치)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치료 못해.
衾裏淚如氷下水(금리루여빙하수) 이불 속에 흘린 눈물 얼음 밑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밤낮으로 흐르지만 사람들은 모르리.
옥봉의 <규정(閨情)>이란 시이다. 평생 이별을 한 것이 그리움에 사무쳐 병이 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병은 술을 먹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약을 먹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보고 싶어 매일 밤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리니 그 눈물을 누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랴?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이나 냉정한 조원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옥봉은 이러한 시들을 쏟아놓고 세상을 떴을 것이다. 그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난리통에 죽었으려니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생사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조선선비들 사이에서 옥봉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그 후일담이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그녀가 죽은 지 40년쯤 뒤,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원로대신의 질문에 “부친”이라고 대답하니,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보여주었는데『이옥봉시집』이라 씌어 있었다. 아버지의 첩으로 생사를 모른 지 벌써 40여 년이 된 옥봉의 시집이 어찌하여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는지 조희일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원로대신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약 40년 전,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시체가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서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돌아다닌다고 했다. 사람을 시켜 건져 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한 겹 두 겹 벗겨내니, 바깥쪽 종이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으나 안쪽 종이에는 빽빽하게 시들이 적혀 있었다. ‘해동조선국승지조원지첩이옥봉(海東朝鮮國承旨趙瑗之妾李玉峯)’이라는 이름도 보였다. “시를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이라, 내가 거두어 책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 말 역시 전해오는 말을 기록한 것이니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는 없다. 좌우간 이옥봉은 허난설헌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여류시인이다. 허난설헌이 규수시인이라면, 매창은 기생 중에 으뜸인 시인이며, 이옥봉은 小室중에 으뜸인 시인이다.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40년 삶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를 두고 허균은 “시는 또한 맑고 씩씩하며 여성 특유의 화장냄새가 없다[詩亦淸壯 無脂粉態]”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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