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閨怨 - 도곡 홍우기

향수산인 2016. 8. 26. 01:29

閨怨

 

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

紅顔은 어듸 두고 白骨만 무쳣난

자바 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위의 시조는 임제가 황진이 묘를 지나면서 읊은 글이다. 기생이지만 재색과 문장이 출중했으니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나보다. 그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처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었으나 부임길에 황진이 묘에 술 한 잔 부어놓고 이렇게 시조 한가락을 읊었던 사람이다.

임제(林悌, 1549-1587)의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이며,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이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사대사화(四大士禍)를 겪고 다시 당쟁이 태동하던 시기에 살면서 서로 헐뜯고 비방하며 편당을 짓는 조선의 추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이에 실망한 임제는 과거나 출세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홀로 속리산에 은둔한 대학자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찾았다. 당시 호남지방 선비들은 거의가 과거급제를 위하여 사암(思庵) 박순(朴淳)에게 몰려들었지만 그는 속리산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는 대곡의 문하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비롯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손곡(蓀谷) 이달(李達)과 같은 석학들을 만났고 백사 이항복(李恒福)도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할 정도였으니 그의 학문적인 경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임제가 지었던 <閨怨>을 감상해보자.

 

十五越溪女 열다섯 되었을까 어여쁜 소녀

羞人無語別 수줍어 말 못한 채 이별하고는

歸來掩重門 돌아와 중문을 닫아걸고서

泣向梨花月 밝은 달 바라보며 흐느끼누나.

 

이 시는 측기식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별() ()이란 측성운을 사용하였다. 중국 월()나라의 제기(諸暨) 저라촌(苧蘿村)에는 동서(東西)로 두 마을이 있는데 서시(西施)는 그중 서쪽 마을에서 살았으므로 불린 이름이다. 그녀의 아비는 땔나무를 팔아가며 살았고 어미는 빨래를 하여 살았으며 서시 역시 시내에서 빨래를 했으므로 완사계(浣紗溪)라고도 불렸다. 그러므로 월계녀(越溪)는 서시(西施)를 가리키지만 후에 미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열다섯 소녀라면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뜨는 시기이다. 그 시기에 사랑을 했고 그 첫사랑 사내를 떠나보내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를 보면, 서시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이별을 하게 되었는데, 남의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부끄러워 사내에게 가지 말라는 이야기도 못했는지 모르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진 것이다.

전구(轉句)와 결구(結句)를 보면, 돌아와 중문(重門)을 닫아걸고서 배꽃처럼 하얀 달을 보며 눈물 흘리는 여인이 보인다. 중문이 있음은 양반집 여인이요, 누가 볼까 중문까지 닫아걸었으니 그 슬픔을 누가 알 수 있고 누가 위로해줄 수 있으랴? 하지만 오늘 따라 더욱 밝고 아름답게 보이는 저 달이 더욱 그녀를 서럽게 한다. 달만 바라보며 그저 눈물만을 흘리는 조선시대 여인의 슬픔이 진솔하게 담겨졌다고나 할까?

임제는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이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을 누비다보니 기생들과 얽힌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그중에 재미있는 몇 수를 소개해본다.

임제가 어느 날 한양에서 술에 만취해 수원의 어느 주막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 집 주모가 너무나 예뻐 하룻밤을 동침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만 서방에게 발각되어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자 그는 시 한 수만 짓고 죄를 받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청하자 그 서방이 허락함에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었다.

 

昨夜長安醉酒來 어제 밤 장안에서 술이 취해 왔더니

桃化一枝爛漫開 복숭아꽃 한 가지 흐드러지게 피었네.

君何種樹繁華地 그대는 어찌하여 번화한 데 심었던가?

種者非也折者非 심은 사람 잘못인가? 꺽은 사람 잘못인가?

 

술이 취해있고 요염한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이러한 아름다운 꽃과 같은 여인을 뭇 사내들이 드나드는 주막에 두었으니 주막에 둔 그대가 잘못한 것인가 유혹에 넘어간 내가 잘못한 것인가를 꼬집어 말한 것이다. 그 서방은 이 시를 듣고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를 용서했다고 한다.

임제가 평양을 떠날 무렵 친구들이 송별연을 베풀었는데 옆에 월선(月仙)이라는 동기(童妓)에게 부채를 선물하면서 거기에 이렇게 썼다.

 

莫怪隆冬贈扇杖 한겨울에 부채준다 괴이치 마라

爾今年少豈能知 너는 지금 나이 어려 알 수 없으리

相思半夜胸生火 한밤중 상사병에 가슴이 타면

獨勝炎蒸六月時 유월염천 더위보다 더욱 뜨겁지

 

여기서 융동(隆冬)은 한겨울을 뜻한다. 부채는 입하(立夏) 단오(端午)에 즈음하여 선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로 여름이 시작되고 날이 더워지면 부채를 사용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에 부채를 선물하니 어린 나이에 생각을 해봐도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러나 이 부채가 왜 한겨울에도 필요한지를 작가는 설명하고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니 이야기가 재미있다. 나이가 어리니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이성을 그리워하게 될 나이가 되면 사랑하는 임이 생기면 그리움에 마음에 불이 나면 유월염천의 더위보다도 가슴이 더 뜨거울 것이니 그때 이 부채를 그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니 참으로 시가 절묘하다.

다음은 작자가 한우(寒雨)라는 기생(妓生)과 화답(和答)한 작품이다. 당시 한우라는 기녀는 재색을 겸비한데다 시문에도 능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뛰어났다. 노래 또한 절창이었다. 얼마나 콧대가 높고 쌀쌀 맞았으면 찬비라 했겠는가? 그는 저녁 무렵 寒雨의 집 담장에 기대어 옥퉁소를 기막히게 한가락 불고 나서는 시조 한수 읊는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북쪽 하늘이 맑아서 우비도 없이 길을 나섰으나 산을 지나다 보니 산에서는 눈을 맞았고 들에서는 찬비를 흠뻑 맞게 되었다는 뜻이다. 찬비를 만났음은 한우를 만났음이요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산에서 눈을 맞았고 들에선 찬비를 맞았는데 그냥 이대로 얼어서 자야 해? 라고 묻는 것이다. 시조를 들은 한우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열어 놓았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자면 어떨꼬

 

무엇 때문에 얼어 주무시렵니까? 원앙침 비취금 다 있는데 왜 춥게 자려하십니까? 오늘은 찬비를 맞았으니 저와 함께 따뜻하게 주무시고 가십시오. 이쯤 되면 아무리 무정한 사람이라도 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가히 재자(才子) 와 가녀(佳女)의 난만한 수작, 즉 호걸과 명기의 찰떡궁합이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들을 보면 임제의 재치와 문장실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살다가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임제는 슬하에 43녀를 두었는데 셋째 딸의 아들이 숙종 때의 대정치가 미수 허목이다. 허목은 남인의 우두머리로 우암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던 거목이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시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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