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得家書 寄家書
陶谷 洪愚基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동악은 서울 남산(南山)의 별칭으로 그가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명명한 호이다. 그는 18세에 진사과 초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나 함께 공부하던 학동들의 시기와 방해로 2차 시험인 복시에 응하지 못하게 되자, 과거(科擧) 대신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석주(石洲) 권필(權韠)・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해봉(海峯) 홍명원(洪命元) 등과 교우 관계를 맺고 시문학에 정진하였다. 이들의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 하는데, 지금도 서울 남산 동국대학교 내에 그 흔적이 있다.
동악은 당시(唐詩)에 뛰어났으며 평생 시작(詩作)에 힘써 시 4,379수를 남겼다. 권필과 우의가 깊고 시명(詩名)이 비등(比等)하여 세상에서는 두 사람을 이백과 두보에 비유하였다. 그는 시를 지을 때에 한 글자도 가볍게 쓰지 않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버렸기 때문에 남은 작품이 우수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풍을 보면 고답적인 내용보다 현실에서의 절실한 문제를 주로 다루었고, 사실적 표현이 돋보인다. 저서로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있다.
동악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부친이 잇따라 작고하자 어머님을 위해 마침내 과거에 나가게 되었고 선조 32년(1599)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한 뒤 함경도관찰사 예조판서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는 도학(道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문학(文學)에 힘쓰되 평생 “뜻을 얻으면 경제일세(經濟一世)하고 뜻을 잃으면 은둔한거(隱遁閑居)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았다. 또한 그는 언제나 공무를 보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단속했으며 그의 집무실인 동헌에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不易心)’는 편액을 걸어놓을 정도였다. 1636년 결국 김상헌(金尙憲)·김덕함(金德諴)·김시양(金時讓)·성하종(成夏宗) 등과 함께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이제 그가 함경도의 북평사로 있을 때 지은 <득가서(得家書)>와 <기가서(寄家書)>를 살펴보자.
得家書
絶塞從軍久未還(절새종군구미환)
鄕書雖到隔年看(향서수도격년간)
家人不解征人瘦(가인불해정인수)
裁出寒衣抵舊寬(재출한의저구관)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변방에서 군을 따라 오래 집을 못가 봤고
고향 편지 받아도 해가 지나 보게 되네.
집사람은 내가 마른 것을 알지 못해
지어 온 겨울옷이 예전처럼 크더라.
동악이 살았던 시기는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이 있었고, 인조반정(1623)과 이괄의 난(1624)이 있었으며,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 있었다. 평생에 단 한번을 겪어도 힘든 내우외환이 이렇게 자주 스쳐갔으니 당시를 살아야했던 민초들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니 이런 상황에서 관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적당히 눈치나 보면서 사는 사람들이야 당면한 과제가 어떻건 적당히 회피하면 되겠지만 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현실은 참으로 고달팠을 것이다. 사무가 많았고 바쁘게 이곳저곳 돌아다녔으니 집에서 온 편지를 제때 받아보지도 못하고 해를 넘겨서야 받게 되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편지도 이렇게 받아볼 지경이니 어찌 집 생각이나 할 수 있으랴? 역시 집에서도 그 소식을 들을 수 없었으리니 그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랴? 집에 사는 아내인들 삐쩍 마른 남편의 형상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를 알 수 없으니 예전과 같으리란 생각만 하고 넉넉하게 옷을 지어 보낸 것이다. 시인은 감정을 눌러가며 글을 써서 부치고는 다음과 같이 <기가서(寄家書)> 두 수를 쓴다. <득가서(得家書)>와 <기가서(寄家書)>가 『동악집(東岳集)』 북새록(北塞錄)에 이어서 실었으니 편지를 받고 짓고 답장을 쓰고 나서 바로 지은 것이다.
寄家書 1
欲作家書說苦辛(욕작가서설고신)
恐敎愁殺白頭親(공교수쇄백두친)
陰山積雪深千丈(음산적설심천장)
却報今冬暖似春(각보금동난사춘)
가서를 부치고는 1
가서(家書)를 쓰며 괴로움을 말하려다
흰 머리 부모님 근심할까 두려워
그늘진 산 쌓인 눈 깊이가 천 장인데
금년 겨울 봄처럼 따뜻하다 적었지.
寄家書 2
塞遠山長道路難(새원산장도로난)
蕃人入洛歲應闌(번인입락세응란)
春天寄信題秋日(춘천기신제추일)
要遣家親作近看(요견가친작근간)
가서를 부치고는 2
먼 변방 산은 길고 도로는 험하니
변방사람 서울 가면 연말이나 되리라
봄날에 부친 편지 가을 날짜 적는 것은
부모님께 근래에 본 것처럼 보냄이네.
시를 읽다보면 부모와 가족을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북쪽 변방인데다 산이 그늘지니 얼마나 추울 것이며 눈이 쌓여 천장이나 되니 생각만 해봐도 살을 에는 바람에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럼에도 부모가 걱정할까 근심하여 금년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집에서 이글을 보며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표시이다. 또한 해를 지나서야 편지를 받았으니 이 글이 집에 도착하는 것도 결국은 아무리 빨라야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어 도착할 것이기에 가을 날짜로 보내니 그 이유는 가을인 지금도 건강히 잘 있다는 거짓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번인(蕃人)이란 미개하여 문화 수준이 낮은 사람을 뜻하는데 이를 시어(詩語)에 담은 것은 변방에 사는 사람 편으로 겨우 편지를 보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동악의 시를 둘러보니 학곡공과 해봉공에 관련한 시가 많았는데 그중에 재미있는 시가 있어 한수 소개한다. 해봉 홍명원이 동악의 집을 방문했는데 학곡 홍서봉이 이어 도착했다. 해봉은 1573년생이고 학곡은 1572년생이며 동악은 1571년생이었다. 이러함으로 세 사람이 서로 나이에 대하여 시를 지었는데 동악은 특히 이 시를 지어놓고 해봉에게 보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三人相對齒相聯(삼인상대치상련)
堪笑龍鍾酌最先(감소용종작최선)
坐上莫嫌偏在下(좌상막혐편재하)
詩中方見妙無前(시중방견묘무전)
願同鶼蟨行常逐(원동겸궐행상축)
爭奈雲泥望却懸(쟁내운니망각현)
今日所期唯義分(금일소기유의분)
白頭毋負鹿鳴篇(백두무부녹명편)
세 사람이 서로 만나 나이 서로 이어졌고
나이 많아 잔을 먼저 받으니 우스워라.
좌상에서 맨 아래에 있다고 싫어 마시게
시에서 보임은 미묘함이 앞에 없지
친밀하여 항상 따라 다니기를 원했으나
운니처럼 떨어져 바라보니 어찌할거나
오늘은 오로지 의분만을 기약하며
늘그막에 녹명편을 등지지 마십시다.
운니(雲泥)라고 함은 서로의 처지가 구름이나 진흙 같아서 구름은 하늘에 머물고 진흙은 땅에 머물기에 서로 만나고자 하여도 좀처럼 만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녹명편(鹿鳴篇)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훌륭한 손님을 맞아 흥겨운 잔치를 벌인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로 도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 취지로 부르는 노래이다.
동악 이안눌의 양모인 구(具)씨 부인은 당시 전국에서 이름난 갑부였다. 동악이 구씨가문의 제사를 모신 관계로 그 집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으니 동악은 매우 부유했다. 더구나 40년 가까이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부족할 게 없었음에도 언제나 가난한 선비처럼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청렴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동기간의 우애도 각별했다. 병란 중에 집이 불타버린 백형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백형이 작고한 다음에는 질녀들의 혼사를 자기 딸처럼 돌보아 주었다. 또 식솔이 많으면서 가난하게 사는 중형을 위해서도 그는 평생을 두고 생계를 돌보아 주었으며 남산(南山) 밑에 있었던 큰 저택도 서슴지 않고 조카에게 주었다고 한다.
동악에게는 재미있는 야사가 하나 전해지기에 문미에 소개한다.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쥐불놀이를 하며 달에게 소원을 빌기도 하고 다리밟기도 하고 징과 장구 꽹과리를 두들기며 흥겨운 놀이를 한다. 조선중기에도 명절의 풍경이 그러했나보다. 동악 이안눌도 장가를 간지 얼마 안되어 정월 대보름 놀이를 보러 밖에 나갔다가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어느 집 대문 앞에 만취해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발견한 그 집 사람이 새로 장가 온 새서방인지 알고 신방으로 업어다 뉘였던 것이다. 그날 밤 새 금침 속에서 신혼의 단꿈을 꾸고 깨어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도 잠을 깨어보니 지난밤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 집은 김진사 집이며 소녀는 이 집 무남독녀로 사흘 전에 혼사를 치렀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한숨을 지었다. 이 말을 들은 이안눌은 전생의 인연이 깊었는가 싶다며 근처에 혼자 사시는 이모가 있으니 차라리 이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그리로 가자고 해 몰래 길을 나섰다. 한편 신부 집에서는 딸이 없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신랑 집으로 사람을 보내어 어제 저녁 신부가 급사하여 미처 기별도 못했다며 초상을 치렀다. 동악은 그 뒤 열심히 공부해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처자를 소실로 맞았다고 한다. 그 여인을 생각하고 지은 것일까? 다음의 <문가(聞歌)>가 애절하다.
江頭誰唱美人詞(강두수창미인사)
正是孤舟月落時(정시고주월락시)
惆愴戀君無限意(추창연군무한의)
世間惟有女郞知(세간유유여랑지)
강가에서 누가 미인사(美人詞)를 부르나?
지금 조각배에 달이 지는 시간인데
쓸쓸히 님 그리는 무한한 마음
세간에선 오로지 저 여인만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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