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終命吟

향수산인 2017. 6. 17. 21:18


만사(挽詞)나 만장(挽章)이 한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며 슬픔과 서운함 안타까움에 저승에서의 기복(祈福)을 담아 읊은 눈물의 글이라면 종명시(終命詩)나 종명음(終命吟)은 내가 세상을 떠나가면서 내 자신의 평생을 돌아보며 후학들이나 후손들에게 당부도 겸하면서 유언처럼 남기는 시이다. 각자 살아온 방식이나 환경이 다르니 거기에는 사용하는 어휘도 다르고 표현방식도 다르지만 그 주제나 내용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근래 시인 박정만은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와 같이 읊으면서 세상을 떠났다하니 이 또한 아름답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니 성삼문과 이개의 종명시가 더욱 가슴을 파고든다. ! 이러니 이들을 만고의 충절이라 이르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주 오래전의 일임에도 코끝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전략(前略)  

세조가 성삼문에게 묻기를, 강희안이 그 역모를 아느냐.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실지로 알지 못한다. 나으리가 선조(先朝)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 두어서 쓰게 하라.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하여, 강희안은 마침내 죄를 면하였다. 성삼문이 나갈 때에 좌우 옛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성세를 이룩하라.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하였다. 수레에 실릴 때에 임하여 시를 지어 이르되,

 

擊鼓催人命 북소리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斜 돌아보니 하루 해 기울었구나.

黃泉無一店 황천엔 주막도 하나 없는데

今夜宿誰家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어야하나

 

하였다. 그 딸이 나이 대여섯 살쯤 되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는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하였다. 그 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몸을 굽혀서 마시고 시를 지었다.

 

食人之食衣人衣 사람의 음식 먹고 사람 옷을 입었으니

所一平生莫有違 한결같은 평생의 뜻 절대 어김 없으리

一死固知忠義在 한 번 죽음에 충의(忠義)가 있음을 아노니

顯陵松柏夢依依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른아른

 

이개(李塏)도 수레에 임하여 시를 지었다.

 

禹鼎重時生亦大 우정(禹鼎)처럼 중할 때는 삶 또한 크거니와

鴻毛輕處死有榮 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 죽음도 영화로다.

明發不寐出門去 날 밝도록 잠들지 못하다 성문을 나가는데

顯陵松柏夢中靑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도 푸르더라  

후략(後略)

    

엊그제 노산(潞山) 김욱조(金頊祚)선생을 만나 선생이 번역한 도암세고(桃巖世稿)라는 책을 전해 받았는데 그곳에 도암(桃巖) 김중묵(金重默, 1900-1981)선생이 읊은 종명음이 있었다. 더듬더듬 읽다보니 자못 의미심장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시인의 좋은 해석도 있지만 시를 감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기에 나름 달리 풀어보았으나 역시나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아아! 이렇게 시를 읊으며 멋지게 세상을 떠나갈 수 있을까...


終命吟

天道乖常坎水天(천도괴상감수천)

野人求志遯山緣(야인구지둔산연)

少時憂國從玉碎(소시우국종옥쇄)

行迹逸民擧瓦全(행적일민거와전)

 

천도(天道)가 어긋나 험난했던 한 세상

야인(野人)으로 뜻을 찾아 산속에 숨었더라.

젊어선 나라 걱정 죽고자 하였지만

행적(行迹)은 일민(逸民)으로 구차하게 살았구나.

 

坎水: 험난(險難)이 거듭되는 상태.

玉碎: 공명(功名)이나 충절(忠節)을 위해 깨끗이 목숨을 버리다.

逸民: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고 외딴곳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

瓦全: 체면(體面)·절의(節義)를 돌보지 않고 구차히 삶을 꾀하다. 



'서론과 글감 > 도곡논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夜起獨行  (0) 2017.08.25
遊貴州有感  (0) 2017.06.30
勿緇柱詩  (0) 2017.06.07
得家書 寄家書  (0) 2017.02.13
月汀 白承勉 先生의 華甲展에 부쳐   (0) 2016.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