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夜起獨行

향수산인 2017. 8. 25. 04:14

명시감상

夜起獨行

陶谷 洪愚基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이황(李滉)의 문인 윤근수(尹根壽)에게 글을 배웠으며, 성혼(成渾)의 도학(道學)에 연원을 두고 학문을 했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글씨는 동기창체를 잘 썼다. 저서로는 청음집(淸陰集)』『야인담록(野人談錄)』『풍악문답(豊岳問答)등이 있다. 3세 때 백부인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는데,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를 비롯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청음(淸陰)은 신흠(申欽) 이정구(李廷龜) 유근(柳根) 홍서봉(洪瑞鳳) 이안눌(李安訥) 조희일(趙希逸) 장유(張維) 홍명원(洪命元) 이호민(李好閔) 김류(金瑬) 등과 교유하였다.

 

白沙宅同鶴谷后泉北渚別海峯

朋簪惜別倍多情 酒煖茶香笑語淸

殘燭伴人燒未盡 夜闌相對鬢添明

 

친구와 석별하니 더더욱 다정하여

따뜻한 술 향긋한 차 웃음소리 맑더라

사람들과 짝한 촛불 다 타지 않았는데

잔야에 마주하니 백발 더욱 희구나

 

이 시는 청음이 백사(白沙) 윤훤(尹暄)의 집에서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후천(后泉) 소광진(蘇光震) 북저(北渚) 김류(金瑬)와 함께 해봉(海峰) 홍명원(洪命元)을 전별하는 장면을 서술한 것이다. 이렇게 모임을 파하고 나면 각자 임지로 떠날 것이니 언제 다시 만날지,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러니 따뜻한 술이나 향긋한 차에도 일부러 더 맑게 담소하는 것이다. 촛불이 다 타지 않았음은 밤이 다 지나가지 않았고 모임도 끝나지 않았으나 조금 있으면 헤어져야 함을 암시한다. 그런 중에 서로의 백발이 보인 것이다. 백발은 늙음과 근심을 상징한다. 이들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으니 이들의 근심은 지금 우리들의 생각보다 더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쇠퇴하는 명과 발흥하는 청의 중간에서 조선은 외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봉 홍명원은 강홍립이 거짓 항복한 사건으로 인해 진노하고 있는 명을 달래기 위해 1619년 고급사(告急使)가 되어 명을 다녀왔던 인물이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해봉은 명천자로부터 의주의 군사도 주둔할 필요가 없다.”는 칙서와 은화 이만냥을 받아왔던 인물이다. 이 시는 그 즈음에 백사의 집에서 명으로 가는 해봉을 전별하며 지은 것 같다.

청음은 알려진 바와 같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척화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청음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조정은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론(主和論)이 대세를 이뤘지만, 청음은 이제 임금과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기로 맹세한다면 전하 위해 죽을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하늘이 끝내 재앙을 거두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돌아가 선왕(先王)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명분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라며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정온(鄭蘊) 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격렬하게 척화를 주장했다. 인조 역시 잠시 주전론에 마음이 기울었으나 날은 춥고 성은 점점 고립되어 어려워지자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

16371월 대표적인 주화파였던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할 때 청음은 뛰어들어 국서를 갈기갈기 찢고 통곡했다. 인조가 무릎 꿇고 항복하자, 강화도에 있던 청음의 형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해봉의 아우 무적당(無適堂) 홍명형(洪命亨)은 강화도에서 스스로 폭약에 불을 붙여 순절하였고, 청음 역시 자결을 결심하고 6일 동안 굶다가 스스로 목을 맸지만 주위 사람의 눈의 띄어 성공하지 못했다. 청음은 2월 관직에서 물러나 안동 소산마을 청원루(淸遠樓)로 들어갔다가 다시 학가산(鶴駕山)자락 서미리(西薇里)에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목석거(木石居)라 하였다. 나라를 못 지킨 신하가 고사리나 캐어 먹으면서 죄인이 돼 목석처럼 지낸다는 의미이다.

 

西磵草堂偶吟

石室先生一角巾 暮年猿鶴與爲羣

秋風落葉無行跡 獨上中臺臥白雲

 

석실(石室) 선생 일각건(一角巾)을 쓰고서

늘그막에 원학(猿鶴)과 함께 논다네.

가을바람 지는 낙엽 행적 없지만

중대(中臺)에 홀로 올라 백운간(白雲間)에 누웠더라.

 

<서간초당우음(西磵草堂偶吟)>은 서간초당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시이다. 일각건은 은자들이 쓰는 모자이니 이글을 쓸 당시의 청음은 벼슬을 버리고 산속 깊은 석실에서 사는 처지이지 더 이상 벼슬아치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 함께 담소할 면목도 없어 원숭이나 학과 같은 짐승들과 어울리니 자신의 처지가 마치 짐승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적은 흰 구름이 이는 곳에서 가을바람에 낙엽처럼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다음 시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夜起獨行

南阡北陌夜三更 望月追風獨自行

天地無情人盡睡 百年懷抱向誰傾

 

남북의 논밭 길 밤 깊은 삼경인데

달 보고 바람 따라 혼자서 길을 가나

천지는 무정하고 사람 모두 잠이 드니

백년의 회포를 누구에게 얘기할까

 

청음은 병자년(1636) 이래 평상시에 늘 걱정과 울분에 잠겨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서성거렸던 것이다. 사방은 어둡고 황량하다. 민생은 피폐하고 나라는 혼란하여 어디 편안할 곳이 없다. 그나마 떠있는 달을 보고 길을 가고 있지만 하늘에 대고 말할 것인가? 땅에 대고 말할 것인가? 그래도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 잠이 들었다. 나라가 어려워진 상황에 지식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感意

扈蹕前年駐漢南 會稽遺恥到如今

殘生不是貪生者 尙在人間負宿心

 

지난해에 임금 따라 남한산성 있었지만

회계(會稽)의 남은 치욕 오늘에 미쳤구나.

잔생(殘生)이지 탐생(貪生)한 자 아니건마는

인간세상 살아가며 숙원(宿願)을 저버렸다.

 

<감의(感意)> 4수중 첫번째인 이 시는 인조가 청태조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한 치욕스런 상황을 떠올린다. 호필(扈蹕)이나 호가(扈駕)는 천자의 수레를 수종(隨從)하는 것을 뜻한다. 청음은 굴욕적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춘추시대 회계전투에서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패전(敗戰)하자, 회계(會稽)에 부차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가 되기를 애원하여 겨우 살아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구천은 범려(范蠡)의 말을 듣고 회계의 치욕을 22년 만에 갚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임금에게 그런 치욕을 안겼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할 수도 없으니 이젠 생을 탐할 자격도 없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은 잔생일 뿐이요 숙심(宿心)을 저버렸으니 목석과 같은 사람이라고 청음은 고백한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해 오자 김상헌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싸우다가 안 되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의를 지켜야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여기에 청음은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1640년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면서 다시 서울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심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자 漢江水

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심양에서 적국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도 청음은 자신의 생각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의 행적을 꼬치꼬치 캐묻는 적국의 관료에게 오히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때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데도 의리만을 내세운 척화파를 비판하지만 청나라는 잡혀간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 등의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고 조선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니 왕이 항복을 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화파의 적절한 대응력에 더해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의 꼿꼿한 선비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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