恒心과 學養의 書論家
- 철견 곽노봉전에 부쳐 -
“의석은 마침표를 찍은 적이 있습니까?”
이천 년 초에 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안산에 있는 철견 선생 댁을 찾았을 때 들었던 말이다. 당시 이것저것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늘 생각에 머물렀을 뿐 확실하게 시작한 것도 분명하게 끝을 맺은 것도 없었으니, 이 말은 정확하게 나의 빈 곳을 찾아들었다. 나는 그 날 해박하고 냉철하게 펼쳐지는 서론에 그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시원함을 느꼈다.
철견 선생이 서울 관악산으로 이사를 한 이후 선생과 나는 陶明君의 『中國書論辭典』에 대한 번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확하게 등분하여 번역과 입력을 하였지만 그 후 교정을 비롯하여 모든 지루한 과정들을 선생이 도맡아 하였으니 나중에는 공저로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미안했다. 그러나 나에게 이 『서론용어소사전』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해준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당시 단어 문맥 띄어쓰기 접속사 문장부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분명하고 꼼꼼하게 살피는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그간 내가 얼마나 허술하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번 전시장 한쪽에 함께 전시된 39종 50권의 저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나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이 책들이 우리 한국서단 서예가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고 보다 많은 정보들을 알게 해준 큰 보물임을 한국의 서예가라면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누가 이런 전시를 또 열 수 있을까? 전시장을 둘러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書山ㆍ學海>라는 1998년도 대련 작품이 눈에 더욱 들어온다. “書山有路勤爲徑 學海無涯苦作舟[글씨라는 산이 아무리 높아도 부지런히 공부하는 자만이 오를 수 있고 학문의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힘써 노력해야만 건널 수 있다].” 결국 이것이 답이었다. 철견 선생은 “의석은 마침표를 찍은 적이 있습니까?”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어떻게 해야 그 답을 얻을 수 있는지 당신이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많은 저작들은 결국 初心을 끝까지 지켜냈고 恒心을 통해 쏟아져 나온 産物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마침표 덕분에 필자 역시 몇몇 책을 출간할 수 있었으니 모든 것이 선생의 덕이 아닐 수 없다.
철견 선생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歐陽修散文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중국미술학원에서 「中國書法與中國當代書壇現狀之硏究」로 다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중문학과 서예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두 번 받은 인물이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서단에서는 국전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고, 학계에서는 한국서예학회 회장과 원곡서예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문화계에서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50권의 저서가 있으니 더 이상 무슨 수사가 필요하랴?
이번 전시를 둘러보며 눈에 띄는 글이 있다면 다음의 <學書爲樂>과 <陋室銘>이다.
明窓淨几 筆硯紙墨 皆極精良 亦自是人生一樂 然能得此樂者甚稀 其不爲外物 移其好者 又特稀也
밝은 창 정갈한 책상에 지필묵연이 모두 지극히 좋은 것 또한 인생일락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부귀와 같은 다른 것을 위하여 좋아하는 것을 바꾸지 않는 사람 또한 특히 드물다.
<學書爲樂>은 蘇轍이 <寄範文景仁>에서 거론했던 것을 歐陽脩가 <試筆>에 기록해 놓은 말이다. 어느 날 동방문화대학원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다가 그의 스승 白石 金振和선생을 그리며 썼던 작품이다. 화창한 날씨에 깨끗하게 정돈된 책상이 있고 그 위에 좋은 지필묵연까지 있다면 어느 서예가라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둘러보면 부귀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후자가 바로 自身이라는 것이다. 이를 몇 번이고 감상하다보니 그렇게 공부를 했고 그렇게 많은 성과를 내었건만 자신을 몰라주고 있는 세상에 대한 서운함과 현실만족을 위한 노력이 함께 스크랩되어 읽혀진다.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 閱金經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孔子云, 何陋之有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名山이요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靈沼이니 이 곳이 누추한 방이나 나의 덕은 향기롭네. 이끼는 섬돌을 올라와 푸르고 풀색은 주렴 안으로 들어와 푸르다. 담소하는 홍유가 있지만 왕래하는 백정이 없다. 거문고를 타고 불경을 읽을 수 있으며, 귀를 어지럽히는 絲竹이 없고 몸을 괴롭히는 문서가 없으니, 남양 제갈량의 집이요 서촉 양자운의 정자로다. 그러므로 공자는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劉禹錫의 <陋室銘>이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그곳이 바로 名山이요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그곳이 靈沼가 된다. 철견은 골방에 틀어박혀 쉴 새 없이 번역을 했고 글씨도 썼으며 책을 출간했다. 본인은 비록 좁은 골방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곳으로 수많은 문인묵객들이 드나들었고 전국 대부분의 서예가들이 그의 책을 사서 보았으며 그 책으로 인해 서예의 심오함을 느끼게 하였으니 그 골방은 바로 용이 사는 연못과 다르지 않다. 혼자 좋아서 했던 일이지만 그것이 이제는 큰 울림이 되어 한 나라의 서단을 학양의 길로 인도하고 있지 않은가?
철견 선생의 글씨를 보면 强弱ㆍ粗細의 변화가 심하고, 필획과 결구에는 맹렬한 기세가 느껴진다. 어떤 작품을 보면 바늘하나 용납하지 않을 듯한 치밀함을 보여주다가도 어떤 작품에 이르러서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철견의 글씨에서는 귀족적이기보다는 토속적인 투박함이 드러나고, 잘 다듬어진 정원을 걷는 느낌보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야생의 숲길을 지나가는 느낌이다. 한중일 어느 작가를 보아도 철견처럼 글씨 쓰는 사람이 없다. 철견체는 행서건 예서건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참으로 독특한 필체이다.
글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性情과 學養이다. 이는 서론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글씨를 쓰되 무턱대고 쓰거나 덮어놓고 법첩을 베끼는 사람보다는 그 원리를 알고 쓰는 사람이 낫고, 그를 알아 틀리지 않게 쓰는 사람보다 익숙하게 익혀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이 낫다. 하지만 이조차도 손으로 쓰는 것이요 머리로 쓰는 것이다. 가슴에 큰 뜻이 있어 툭 터진 마음으로 글씨를 쓴다면, 또 모든 욕심을 던져버리고 맑은 마음으로 글씨를 쓴다면 이는 모양만 잘 만들어 쓰는 글씨와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 마음 그 뜻이 그대로 필획이 되고 글씨가 되어 맑게 지면에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씨를 오래도록 써 보고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글씨를 배움에 모름지기 가슴속에 도의가 있어야 하고 또한 성인과 철인의 학문으로 넓혀야 글씨가 귀하게 된다[學書須要胸中有道義, 又廣之以聖哲之學, 書乃可貴]는 黃庭堅의 말과, 글씨를 깊이 아는 사람은 오직 신채를 보고 자형을 보지 않는다[深識書者唯觀神彩不見字形]는 말에 공감할 것이다. 전시작품 중에 좋아하는 시가 있어 소개한다. 이는 圃隱 鄭夢周의 <寫字>로 글씨를 잘 아는 사람도 순간순간 경계해야할 글이다.
心專姸好飜成惑 氣欲縱橫更入邪 不落兩邊傳妙訣 毫端寫出活龍蛇
예쁜 것에 전념하면 도리어 미혹되고 기운을 멋대로 쓰면 다시 사특해지니
양변에 빠지지 않고 묘결을 얻어야 붓끝에서 살아있는 용과 뱀이 쏟아지리.
철견 선생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건강이다. 저작을 하느라고 책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있다 보면 운동이 부족해지고 운동이 부족해지면 알게 모르게 면역력이 떨어진다. 철견 선생은 그야말로 우리 한국서단에 살아있는 보물이다. 지금 전시에서 보여 주듯 그 많은 책들을 발간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서단에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다시 있을 수 있을까 생각된다. 건강과 장수가 바탕이 되어야 글씨도 저작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7년 10월 26일 맑은 가을 햇볕이 따스한 도곡서예관에서 도곡 홍우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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