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月塘 金鎭台 書展에 부쳐

향수산인 2018. 1. 11. 07:21


至誠無息 筆法傳百代

- 月塘 金鎭台 書展에 부쳐 -

 

작품 좀 골라주시겠어요?”

월당선생님(이하존칭생략)의 전화였다. 필자의 어설픈 안목으로 월당의 작품을 고른다는 게 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궁금한 마음에 앞뒤 돌아보지도 않고 응낙을 했다. 사실 더 궁금했던 것은 작가가 어디서, 무슨 책을 보고, 누구를 만나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붓으로 쓰는가?”였다. 글씨야 개인전 회원전 초대전 등을 통해 자주 보아왔지만 가까이 살면서도 그의 서실은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으니 내심 그의 초청이 반갑기도 했다.

서실 문을 들어서자 벌써 서상(書床) 위에서 수십 점의 소작(小作)들이 나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대충 보아도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각각의 서체들이 다채롭다. 이 많은 서체들을 거침없이 쓸 수 있다니 작품을 둘러보는 내내 문자의 상큼한 향기들이 전해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작품이 소자(小字)나 승두서(蠅頭書)임에도 큰 글씨에서나 보이는 중후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기필(起筆) 수필(收筆) 전절(轉折) 등이 정확하며, 대소(大小) 강약(强弱) 고저(高低) 장단(長短) 질삽(疾澁) 주빈(主賓) 종금(縱擒) 기정(奇正) 마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어떻게 쓴 것일까? 궁금증이 밀려온다. 대강 눈에 들어오는 순서대로 몇 점 골라놓고는 질문을 던졌다.

이 작은 글씨들은 어느 붓으로……

월당은 구석에 있는 가늘고 긴 유호필(柔毫筆)을 가리킨다.

저 붓이에요. 8에 호의 길이가 10입니다. 제가 특별히 주문제작한 겁니다.”

대답을 하면서 그동안 써왔던 다른 작품들을 꺼내놓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수백을 헤아릴 정도다. 상자에 담아놓은 것, 두루마리로 말아놓은 것, 부채 등등…… 이들을 따로따로 나눠 몇 차례 주제전을 해도 손색이 없겠다. 나는 그날 그동안 보아온 몇 점의 작품으로 작가를 판단했던 것이 큰 오산이었음을 실감했다. 좀 더 그의 생각을 듣고 싶어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작가의 생각을 몇 가지로 간추려본 것이다.

월당은 첫째, 작품이 작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그림이나 서예작품이 작은 것을 선호한다. 어떤 젊은이들은 깔끔하다는 이유로 벽에 아무 것도 걸지 않지만, 서예전을 가보면 전지나 국전지 정도의 큰 작품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월당은 부담스럽지 않게 벽면에 걸릴만한 작품을 늘 시도하고 있었다. 작품이 걸려 있어야 사람들의 눈에 띄고 사람들이 작품을 볼 수 있어야 예술도 그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둘째, 작품내용이 풍성하고 충실해야 한다. 작품이 작아진다고 글자 수를 줄여 쓰다보면 곧 내용의 부실과 표현의 빈곤에 시달리게 된다. 월당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소자(小字)를 착안했다. 글자가 작아지니 같은 크기의 작품이라도 풍성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글자가 많다고 내용이 충실한 것은 아니다. 늘 보던 글이라면 그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읽을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좋은 작품을 하는 서가는 끊임없이 책을 보고 끊임없이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구상한다.

셋째, 작품의 예술적인 가치가 높아야 한다. 월당의 글씨가 보통의 서가와 다른 것은 한글 한문 고전과 법첩들을 두루 섭렵한데 근원한다. 게다가 동서고금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월당만의 글씨로 작가의 마음이 녹아들어갔으니 작품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던 것이다. 노래를 부른다고 모두 가수가 아니고 그림을 그린다고 모두 화가가 아니며 붓으로 글씨를 쓴다고 모두 서예가가 아님을 우리는 안다. 같은 노래를 불러도 음정박자가 맞는 노래가 낮고, 듣기 좋은 노래라도 기교만이 화려한 것보다 마음이 삭혀든 노래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법이다.

넷째, 흠모할 만한 인품을 갖춰야 한다. “인품이 높은 사람은 한 점 한 획에 저절로 맑고 강하며 단아한 기운이 있지만, 인품이 낮은 사람은 비록 격앙하는 필세와 돈좌의 필법을 써서 의젓하고 볼만하더라도 거침없고 포악함이 종이 밖으로 드러남을 면치 못한다.[品高者 一點一畵 自有淸剛雅正之氣 品下者 雖激昻頓挫 儼然可觀 而縱橫剛暴 未免流露楮外 -朱和羹]”고 한다. 글씨란 자신의 인품과 자신의 학문을 지면에 그대로 쏟아내는 예술이니 어찌 그를 숨길 수 있으랴? 따라서 존경하는 사람의 글씨라면 설령 글씨모양이 어설프더라도 그의 글씨를 소장하고 싶어지고, 흠모할 만한 인품을 갖췄다면 허름한 외모에도 그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 세상사이다. 아름다운 미인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학식을 보고 점차 마음이 끌렸으며 그 인품을 보고 사랑하게 된 광경이랄까?

다섯째, 한글서예 연구에 전력해야 한다. 한글서예는 조선시대를 거치며 발전된 예술이지만 궁중 여인들 사이에서 겨우 그 명맥을 이어왔다. 한글서예는 아직 그 자료도 풍성하지 않고 연구마저 일천하다. 한글고전자료는 거의가 한자음을 옮겨놓았으므로 차라리 한문을 대하는 것보다 난해하다. 근래에 몇몇 지성인들에 의해 번역과 주석작업이 시도되고는 있으나 이 역시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많은 자료도 발굴해 내야하고 그들에 대한 활발한 연구도 진행되어야 한다. 문자를 쓰는 서예인데 그 내용을 모른다면 그 형식이 비록 서예라 하더라도 결코 서예일 수 없음을 절절하게 알아야 한다.

여섯째, 한글서체의 다양화를 모색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세계 각국의 문화를 순간순간 접하고 각양각색의 지구촌 사람들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변하는데 우리의 과거 한글서단은 조선시대 유행하던 궁체(宮體)만을 고수(固守)하고 있었다. 사회에서는 우리의 문자문화에 대해 너무나 답답해했고 새로운 글자꼴의 출현을 간단없이 갈망했으나 한글서단에서는 이를 돌아보지도 않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와 대중적인 욕구가 쉴 새 없이 몰려들자 한글서예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돌파구를 찾아 봇물처럼 터진 것이 바로 캘리이다. 'Calligraphy'의 사전적 의미가 손글씨’ ‘서예라곤 하지만 캘리를 하는 사람이나 서가(書家) 역시 캘리는 캘리일 뿐서예라고 하지 않는다. 대중적인 유행으로 캘리는 인정하지만 예술적인 면에서의 서예로는 미흡한 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 중국문학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 () () () 등을 생각해보자. 그 것들도 처음에는 민간에서 출발하였으나 나중에는 선비들에게서 채집되고 체계화되어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힌트를 찾아봐야 한다. 이른바 캘리가 한글서예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한글서예가 대중 속에서 찬란하게 꽃피우려면 아무래도 그 근원을 서법의 원천 한문서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지난해 부산에서 있었던 전국대표작가 한글서예초대전에서 필자는 한글서예의 변화와 발전을 향한 서광(曙光)을 보았다. 고전을 배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순간순간 발휘되는 기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동안 유행하던 POP가 어느 순간 사라졌음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고전을 배우지 않으면 초롱 없이 밤길을 걷는 것과 같아서 어느 순간 막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고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될 수 있다. 고전을 배운 사람들이 자신들이 배운 서법체계를 무너뜨리고 캘리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도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월당은 한글서예를 주로 쓰지만 한문서예도 서단에서는 정평이 나있는 인물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캘리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한글서체개발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으로는 이러한 인물들이 한글서예의 또 다른 물결을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월당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작은 글씨를 쓰는 것도 좋지만 너무 승두서와 같은 것에 집착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작은 것에 매달리다보면 자칫 마음도 작아질 수 있거니와, 지금은 작은 획 속에 치밀(緻密) 섬세(纖細) 정확(正確) 변화(變化) 능숙(能熟)함이 융합되어 좋게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이 오래되면 흐드러질 수 있고 근골이 약해질 수가 있다. 또한 한자리에서 너무 많이 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습성이 붙으면 자신도 모르게 속서(俗書)에 젖어들 수 있으니 말이다. 솥 속에 개구리가 물이 천천히 더워지는 것도 모르고 편안해 하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처럼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나브로 다가올 수 있음을 늘 경계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월당의 작품들을 둘러보고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진정한 서예인이었다. 그는 무턱대고 글씨만을 쓰는 서예인이 아니요 혼탁한 공모전에 물들어 있는 서예인도 아니다. 그를 만나 잠시라도 이야기를 듣다보면 단지 서예가 좋아 진정으로 서예에 빠져서 사는 작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예로부터 문인상경(文人相輕)이라는 말이 있다. 문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경시한다는 말이나 월당의 작품을 보면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내공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문인(文人)의 입장에서 봐도 예인(藝人)의 입장에서 판단해도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다만 그가 지성으로 쉬지 않고 노력하여 그의 필적이 서사에 길이 남기를 바랄 뿐이다.

 

무술년 새해를 맞이하는 근사재에서 도곡 홍우기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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