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金正喜의 悼亡詩
陶谷 洪愚基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원춘(元春)이며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보담재(寶覃齋) 승연노인(勝蓮老人)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 있다. 추사고택은 한국에 잔존하는 명가중 하나로, 사당채 안채 사랑채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53칸의 집으로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건축했다. 추사가 7세 때에 입춘첩(立春帖)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당시에 세혐(世嫌)의 관계에 있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나가다 집으로 들어와 누가 입춘첩을 썼는지를 물었다. 생부(生父) 김노경(金魯敬)이 답하니, 채제공은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로 이름이 일세를 떨치겠으나 글씨에 능한 즉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붓을 잡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쳐 크게 귀한 사람이 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었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교유하였고, 그들에게서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학문이 너무도 뛰어나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송하였다 한다.
그는 서예에 조예가 깊어 새로운 필체인 추사체를 창안하였으며 그의 필적이 해동제일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문인화(文人画)의 대표작으로는 〈세한도(歳寒圖)〉와 〈부작란(不作蘭)〉등이 있는데 고담(枯淡)하고 간결한 필선으로 문기(文氣)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權敦仁)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추사의 작품으로는 유명한 것도 많고 유명세에 따른 위작도 많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법한 작품 중에 <大烹 高會> 한 점을 소개하려 한다.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幾人 爲古農書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을 풍성하게 삶아 놓고 부부 아들 딸 손자들이 성대하게 모인다면 이것이 촌부자(村夫子)의 제일락(第一樂)인 상락(上樂)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처럼 큰 황금 도장을 차고 음식을 먹는 방에 시첩 수백이 있더라도 이러한 진미(眞味)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고농(古農)을 위해서 쓰다.)
대팽(大烹)은 성찬(盛饌)을 의미하고 고회(高會)는 성대(盛大)한 연회(宴會)를 뜻하는데 바로 大烹과 高會, 豆腐와 兒女, 瓜薑과 夫妻, 菜와 孫은 여기서 대(對)가 되는 시어(詩語)이다. 대팽은 가장 좋은 요리보다 많이 삶는다 많이 요리한다는 뜻이요, 고회는 훌륭한 모임보다 전후문맥으로 보아 성대한 모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자식 손자가 많고 그 자손들이 모두 잘사는 것 그 이상의 행복은 없다. 몇 대 조의 자식 손자 증손자가 도합 몇 십이었다는 것이나 그중에 몇 명이 대과에 급제하고 무슨 벼슬을 한 것이 집안의 큰 자존심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촌부자는 향촌(鄕村)의 학자(學者)이다. 시골에서 학문을 하며 살아가는 학자를 뜻한다. 두대(斗大)는 작은 것에 대하여 큰 것을 상징하며 쓰임새가 큰 곳에 사용하는 물건이다. 도장을 허리춤에 찬다는 것은 관직에 등용되었음을 뜻하고 도장이 말만큼 크다는 것은 큰 벼슬을 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얼마나 벼슬이 높고 얼마나 부유하면 시첩을 수백이나 거느리고 살까?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말 못할 고민들이 더욱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정작 행복한 사람은 바로 부부 아들 딸 손자가 모두 건강하고 번성하여 잘 먹고 잘사는 것이다.
고농(古農)은 여소객(余蕭客, 1732-1778)을 말하는데, 여소객은 청 강소(江蘇) 오현(吳縣)사람으로 자는 중림(仲林)이고 호가 고농(古農)이다. 세상에 칭하기를 그 학술이 왕응린(王應麟)ㆍ고염무(顧炎武)의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추사는 12세에 백부 김노영(金魯永)에게 입양되었으나 그 해에 양부를 잃었고, 15세에 한산이씨(韓山李氏)와 결혼했으나 20세에 부인 한산이씨(향년20세)가 별세하였으므로 23세에 예안이씨(禮安李氏)를 재취하였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었는데, 이때 봉고파직(封庫罷職)시킨 김우명과 정적이 되어 불운한 길을 가게 된다. 추사는 55세가 되던 1840년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었다가 윤상도의 옥사가 재론되면서 추사가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1848년까지 약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추사가 이토록 오랜 세월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가족이 모두 모여 밥 한 번 풍성하고 행복하게 먹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폄적(貶謫) 중에 재취한 아내를 잃었으니 얼마나 애절했을까? 다음에 소개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도망(悼亡)>을 보고 <애서문(哀逝文)>을 읽고 나면 그 애절함을 가슴으로 느낄 것이다.
那將月姥訟冥司 어찌하면 월로(月姥)로 하여 명사(冥司)와 송사하여
來世夫妻易地爲 내세(來世)엔 부부(夫婦)가 자리 바꿔 태어날까?
我死君生千里外 나 죽고 그대가 천리 밖에 산다면
使君知我此心悲 나의 이 슬픔을 당신도 알게 되리.
그는 1842년 제주도에 귀양간 지 3년째가 되던 해(57세) 12월 14일, 30여년을 동고동락했던 부인 예안이씨가, 한 달 전인 11월 13일에 별세했다는 부음을 접한다. 회상해보니 자신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부인이 세상을 뜬 지 7일 후에 보냈고, 그 전 편지는 부인이 세상을 뜨던 날 보냈음을 알게 된다. 몇 천리 밖에서 사랑하던 부인이 숨을 거둔 것도 모르고 자신은 편지를 쓰고 있었으니 그를 생각하면 추사의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시에서 보이는 월로(月姥)는 민간에서 월하노인(月下老人)으로 불리며 혼인을 주관하는 희신(喜神)이요 매신(媒神)이다. 명사(冥司)는 저승의 장관(長官)인데, 내가 명사와 담판할 수 없으니 월하노인에게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추사의 소원이 성사되어 내생에 부부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태어난다면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알지도 못하고 편지를 쓰는 이 비통한 나의 심정을 부인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서글픈 넋두리다. 세상을 뜬 부인도 자신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남편을 볼 수 없으니 비참한 상황이요 살아남은 추사도 부인이 세상을 뜨고서야 연락을 받았지만 부인에게 갈수도 없으니 그 미안한 감정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떠난 사람이나 남은 사람이나 서글프긴 매일반이다.
추사는 30대 젊은 시절부터 제주도에 유배되어 간 50대에 이르기까지 틈만 나면 아내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다. 현재 발견된 40통 중 20통이 제주도 유배시절에 쓰인 것으로 아내의 병을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이 나타나있다. 다음은 추사가 부인 예안이씨를 잃고 지은 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이다.
임인년 11월 을사삭(乙巳朔) 13일 정사(丁巳)에 부인이 예산(禮山)의 추사(楸舍)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다음 달 을해삭(乙亥朔) 15일 기축의 저녁에야 비로소 부고가 해상(海上)에 전해 왔소. 그래서 남편 김정희는 신위를 차려 곡을 하고 생리(生離)와 사별(死別)이 참담함을 느낀다오. 그대가 영영 떠나 돌이킬 수 없음을 느끼고 몇 줄의 글을 엮어 본집에 부치니 글이 도착하는 날 궤전(饋奠)을 올려 영괘(靈几)의 앞에 고하오. 아아! 나는 칼과 차꼬가 앞에 있고 영해(嶺海)와 같은 고난이 따를 적에도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한 부인의 상에는 놀라고 얼이 빠져 마음을 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이오? 아아! 모든 사람이 다 죽어도 부인만은 죽어서는 안 되는데, 죽어서는 안 되는데 죽었으니, 죽어서 지극한 슬픔과 큰 원한을 품어서 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남편의 마음을 움직이니 칼과 차꼬 영해보다 심한 것 같소. 아아! 삼십 년 동안의 효덕(孝德)은 종당(宗黨)에서 칭송했고 친구와 외인(外人)들까지도 모두 감동하여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소. 그러나 부인은 사람의 도리라 생각하여 수긍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소? 예전에 농담으로 “부인이 죽는 것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것이 낫지 않겠소?”라 했더니, 부인은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크게 놀라 바로 귀를 가리고 멀리 달아나서 들으려 하지 않았지. 이는 진실로 세속의 부녀들이 크게 꺼리는 일이지만 그 실상이 이와 같아서 내 말이 다 농담만은 아니었소. 지금 결국 부인이 먼저 죽었으니 먼저 죽는 것이 어찌 유쾌하여 내가 두 눈을 뜨고 홀로 산단 말이오. 푸른 바다 넓은 하늘처럼 나의 한은 무궁하리. [壬寅十一月乙巳朔十三日丁巳 夫人示終於禮山之楸舍 粤一月乙亥朔十五日己丑夕 始傳訃到海上 夫金正喜具位哭之 慘生離而死別 感永逝之莫追 綴數行文 寄與家中 文到之日 因其饋奠而告之靈几之前曰 嗟嗟乎 吾桁楊在前 嶺海隨後 而未甞動吾心也 今於一婦人之喪也 驚越遁剝 無以把捉其心 此曷故焉 嗟嗟乎 凡人之皆有死 而獨夫人之不可有死 以不可有死而死焉 故死而含至悲茹奇寃 將噴而爲虹 結而爲雹 有足以動夫子之心 有甚於桁楊乎嶺海乎 嗟嗟乎 三十年孝德 宗黨稱之 以至朋舊外人 皆無不感誦之 然人道之常 而夫人所不肎受者也 然俾也可忘 昔甞戲言 夫人若死 不如吾之先死 反復勝焉 夫人大驚此言之出此口 直欲掩耳遠去而不欲聞也 此固世俗婦女所大忌者 其實狀有如是者 吾言不盡出於戲也 今竟夫人先死焉 先死之有何快足 使吾兩目鰥鰥獨生 碧海長天 恨無窮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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