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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8. 용장사비(隋)

향수산인 2009. 6. 10. 11:52
 

 

28. 龍藏寺碑<隋>


수나라는 비록 38년간 유지되었지만 서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남북조 서풍을 하나로 만들어 초당 서단에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용장사비>는 위로 육조 비각의 남은 뜻을 계승하고 아래로 당나라 해서의 선구가 되었으니 이전을 계승하여 이후를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용장사비>는 수나라 개황(開皇) 6년(586)에 세워졌다.  구양수는 『집고록(集古錄)』에서 이 비는 장공례(張公禮)가 글을 지었으나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없다고 했다.  해서로 행마다 50자씩 30행을 썼고 비액은 해서로 '恒州刺史鄂國公爲國勸造龍藏寺碑’라고 15자를 썼다.  이 비는 하북성 정정(正定)의 용흥사(龍興寺)에 있으며 명나라 탁본에서 '張公禮'라는 3글자가 훼손되지 않은 것이 제일 좋다.

이 비는 줄곧 해서의 집대성이란 칭찬을 들었는데 용필뿐만 아니라 기운과 풍격도 그러하다.  심지어 이와 같은 뛰어넘을 비는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강유위는 『광예주쌍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나라 비는 점차로 고의(古意)를 잃어가고 형체는 대부분 산뜻하여 절대로 성글면서 그윽한 서풍이 없는데 오직 <용장사비>만 고의를 계승했다.  <용장사비>는 분예(分隸)를 통합하고 아울러 <조비간문>, <정문공비>, <경사군비>, <유의비>, <이중선비> 등을 하나로 융합했다.  편안하고 혼목하면서 굳센 맛을 잃지 않고 단정한 서풍을 나타낸 이 비는 육조의 비를 집대성했으니 유독 수나라에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우세남, 저수량, 설직, 육간지 등이 이 비의 남긴 법을 전했다.  중당이후 이런 유파가 점차로 사라져 뒤에 이를 잇는 자가 없어 안진경과 유공권 같이 추악한 악찰이 나타났다.  이 비를 보면 정말 고금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강유위의 이러한 평가는 탁월한 경지가 있다.  처음 이 비를 보면 매우 평범한 것 같지만 일단 이 비에 들어가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예술적 매력이 있다.  용필을 보면 파리하고 굳세면서 고아하고 골력이 통달해 하나도 같은 필획이 없다.  필획마다 자연스러우며 성정에 합해 깊고 무궁한 맛을 느끼게 한다.  북비의 강하고 험준함과 남조의 담담하고 우아함이 모두 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억지로 꾸민 흔적이 없다.  부드러운 가운데 매우 강한 힘이 있고 강한 가운데 혼후한 기가 있어 이미 북비의 광야(獷野)함을 씻어버리고 또한 남조의 연미함을 버렸다.  평범한 가운데 기이함을 구하고 수려한 가운데 졸함을 얻어 안으로는 근골을 함유하고 밖으로는 아름다움을 얻어 일부러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흔적이 없지만 곳곳에서 범속함을 초탈하는 운치가 나타난다.  방원을 겸비하고 허실을 서로 섞었으며 체세는 성글고 파리하고 골력은 자연스러우며 단정하고 혼목한 풍신이 고아하다.  마치 도를 얻은 도사가 비록 청담한 몇 마디의 말을 했으나 족히 범부를 놀라게 하는 것 같다.  별, 날․사전의 필획은 가다가 머무는 것 같고 머물다 가는 것 같으며 봉망은 반을 숨겨 붓끝의 정을 곡진하게 나타냈다.  종횡은 곧은 것 같으면서 구부러졌고 필획마다 일파삼절을 하여 고질(古質)의 묘한 풍류를 다했다.  필의는 혹 가로가 허공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 같고, 혹 물이 흐른 흔적이 벽에 스며드는 것 같이 자연스러우면서 영활함을 발하였다.  기운생동하고 문질이 섞여 묘하고 세련되어 맑은 마음을 보는 것 같다.  필획은 조화를 나타내고 흔적은 성정을 담았으며 배회하는 사이에 묘하게 고금을 접하게 한다.  비록 왕희지라도 이렇지 못할 것이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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