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충정공의 아제시

향수산인 2013. 3. 15. 14:39

忠正公 兒啼詩

 

홍자번(洪子藩, 1236-1306)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운지(雲之),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진충동덕좌리공신(盡忠同德佐理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지냈고 경흥군(慶興君)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공은 1279년(충렬왕5) 고려(高麗)와 원(元)연합군의 일본(日本)정벌 때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전함건조를 맡았고, 원의 간섭과 간신배들의 이간으로 벌어진 충렬왕(忠烈王)과 충선왕(忠宣王) 부자의 불화를 중재하여 고려를 심각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공은 또한 1296년 ‘편민18사(便民十八事)’를 건의했다. 이는 당시 권세가들의 전민(田民) 강탈이 심해서 사서인(士庶人)들의 불만이 심화되자,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고 생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시 사회의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난 폐단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 내용은 주로 관리의 작폐방지, 공부(貢賦)의 균정(均定)과 정액 이외의 공부수납 억제, 의창(義倉) 등을 통한 백성의 구휼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도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않았음을 다음의 시로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부친[홍예(洪裔)]께서 무술(戊戌) 연간에 옥주수(沃州守)로 부임하였을 때 어머님이 불행히 세상을 떠나시니, 그의 나이 그때 세 살이었다. 그 뒤 28년에 외람히 안부(按部)의 임명을 받자와 선영(先塋)에 와서 절하매 구슬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곧 4운(四韻)을 지었다.[先君於戊戌年間 赴沃州 不幸聖善遂厭世 予時年三歲 後二十有八載 濫承按部之命 來拜先塋 不勝感慘 卽成四韻]

 

兒啼乳歲別慈顔 (아제유세별자안) 젖먹이가 울면서 어미와 헤어질 때

那料孤墳在此山 (나료고분재차산) 이 산에 외로운 무덤을 어찌 생각했으랴?

雖隔音容冥路異 (수격음용명로이) 비록 얼굴과 목소리 저승길에 막혔지만

尙存恩愛綵衣斑 (상존은애채의반) 아직껏 은애하여 색동옷을 입었더라.

一杯宿草魂無昧 (일배숙초혼무매) 한잔 술 풀에 뿌렸으니 어미 혼은 알겠지.

千里歸程淚忍潸 (천리귀정루인산) 천리 길 돌아가나 눈물 겨우 참는다오.

萬種哀情言未盡 (만종애정언미진) 갖가지 서글픈 맘 말로 다 못해

題詩付與水潺潺 (제시부여수잔잔) 시 한 수 지어놓고 흐르는 물에 부쳐보네.

 

이 시는 평기식(平起式)으로 산운(刪韻, 顔山斑潸潺)을 사용하고 있다. 절구(節句)는 네 구로 이루어지고, 율시(律詩)는 여덟 구로 이루어진 시운(詩韻)․평측(平仄)․대구(對句) 등을 맞추어 지은 시이다. 절구는 첫째 구부터 기(起)․승(承)․전(轉)․결(結)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기는 시의 도입(導入)을 나타내는 것이고, 승은 의미(意味)의 연계를 뜻하며, 전은 그 시의 핵(核)이나 반전(反轉)을 나타내고, 결은 바로 결론(結論)이다. 이는 五言이나 七言을 불문하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율시가 되면 복잡해진다. 起承轉結의 순서는 같지만, 전체가 여덟 줄이므로 각각 내구(內句)와 외구(外句)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명칭도 1․2구는 수련(首聯)이라 하고, 3․4구는 함련(頷聯)이라 하며, 5․6구는 경련(頸聯)이라 하고, 7․8구는 미련(尾聯)이라 한다. 아제시를 둘러보자.

수련(首聯)을 보면, 내구 처음부터 아이가 울면서 서럽게 어미와 헤어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자(慈)에서 자(玆)는 발음부분이고 심(心)은 의미부분이다. 자(玆)는 따뜻한 물에 불린 고치에서 뽑은 실을 일정한 장소에 매달아둠에서 따뜻함을 뜻하기도 하고, 초목이 무성함을 의미하는 자(茲)와도 혼용한다. 玆나 茲에 心을 더했기에 자식에 대한 따뜻하고 무성한 어머님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자안(慈顔)은 어머님의 얼굴이다. 어찌 세 살이란 어린 나이에 사별을 생각이나 했으랴? 살아가면서 새록새록 느끼는 그리움이 강했는지, 자식을 버려두고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는 어미가 더 외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덤앞에 선 사람이나 무덤속에 누운 사람이나 그 마음들이 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외구의 분(墳)에서 土는 의미부분이고 분(賁)은 발음부분이다. 賁도 패(貝)위에 훼(卉)가 있다. 조개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흙을 쌓아올려 꾸민 봉분위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모습이다. 이처럼 주검을 땅속에 파묻는 토장(土葬)은 지금까지 지역적·시간적으로 가장 보편화된 형식이다. 토장과 다른 형식은 물속에 넣는 수장(水葬), 주검을 불에 태우는 화장(火葬), 그리고 땅 위에 주검을 드러나게 하여 썩히거나 짐승에게 먹히도록 하는 풍장(風葬) 등이 있다. 사실 장(葬)이라는 글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다. 아래에도 艸이고 위에도 艸인데 그 중간에 死가 들어있다. 시신을 풀섶 위에 놓고 다시 풀로 덮은 모양이다. 葬을 艸 死 土로 쓰기도 한다. 『주역』계사편을 보면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두고서 풀이나 나뭇가지로 덮었으며, 덮개나 봉분도 하지 않았다. 상복을 입는 기간도 결정되지 않았다. 후세에 성인이 이를 고쳐서 관곽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맹자』에서도 “상고에 부모가 죽어도 장사 지내지 않는 시대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부모가 죽자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다. 뒷날 그 곳을 지나다 여우와 삵괭이가 시체를 뜯어 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 먹는 것을 보자 그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보지 못했다. 그 식은땀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흘린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로 나타나 흐른 것이다. 그는 곧 집으로 돌아와서 들것과 가래를 가지고 가서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고 했다. 이처럼 상고시대에는 시신을 그냥 산야에 버리거나 초목으로 덮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점차 사회가 발전하면서 땅에 구덩이를 파 시신을 그 구덩이에 넣고 평평하게 하여 무덤[墓]을 만들었다. 그러나 평평한 형태의 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짐승들이 파헤쳐 시신을 범하는 일이 많았다. 사람들은 시신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고 무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생각했고 이에 시신을 흙으로 묻고 봉토를 하여 총(塚)과 분(墳)을 만들게 되었다.

함련(頷聯) 내구 두 번째 격(隔)에서, 격(鬲)은 오지병이다. 오지병은 정(鼎)과 같이 다리가 셋인데 정(鼎)은 온전히 다리의 기능을 하는 반면 격(鬲)은 두툼한 다리 속에 곡물 등을 담아놓을 수 있는 기물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곳에 있는 물건과 다른 곳에 있는 물건은 서로 떨어져 있게 된다. 여기에 언덕을 상징하는 부(阜)가 있음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언덕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음을 상징한다. 여기서는 그 정도의 경지가 아닌 만날 수 없는 냉엄한 이승과 저승의 다른 세계이다. 이승에서 살며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곳이 저승이고, 저승에서 살며 아무리 돌아오려 해도 돌아올 수 없는 곳이 이승이다. 그러니 그리워해도 서로 말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 모습을 볼 수 없기에 기가 막힌 것이다. 외구 끝에 彩衣斑을 언급한 것은 세 살 때 헤어졌으니 어머니는 아직도 아이로 생각할 것이기에 공은 어머니가 알아볼 수 있도록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입은 것이리라.

경련(頸聯) 내구를 보면 혼(魂)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옛사람들은 혼(魂)은 신(神), 백(魄)은 귀(鬼), 또는 혼은 기(氣)의 신, 백은 정(精)의 신이라고 하여 그 작용에 의해 사람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성리학에서는 특히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기가 흩어지고 모이는 작용으로 설명하고, 『성리대전(性理大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은 양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음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한 잔의 술을 풀 위에 부어 놓고 왔으니 풀뿌리로 흘러내린 술은 땅으로 스며들 것이요 지하로 연결되면 그를 통해 어미는 어린 자식이 왔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새 성장한 자식은 천리 길을 돌아가며 슬픈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마음 오죽이나 했으랴?

미련(尾聯)을 보면 그 슬픔이 극대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로 승화되고 있다. 이시는 작은 눈물보다 큰 시냇물을 동원하여 공의 슬픔을 더 크게 더 멀리 더 오래 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젖먹이 시절에 헤어졌으니 어머니의 얼굴도 모를 것이요, 그로부터 28년이라는 긴긴 세월이 지났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랴? 말 그대로 수만 가지 슬픈 감정이 있었으나 몇 마디 말로는 그 심경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물은 지상으로 흐르지만 지하로도 흐르니 결국 황천(黃泉)으로 연결될 것이요, 이를 시냇물에 부친다면 아들의 시는 결국 어머니에게 전해질 것이다. 어머니도 보고 싶었을 것이고 자식도 사무치게 그리워하니 아마 둘은 꿈에서라도 상봉했으리라. 그런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커서, 백성들을 위해 편민18사를 건의하고 조선시대 영의정에 해당하는 도첨의중찬을 5회나 역임하였으니 지하에서 그 어미는 얼마나 듬직하고 뿌듯했으랴?

안분재공후 홍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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