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성인(唐城引)
이 글의 작가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당성(唐城)은, 남양반도의 서신·송산·마도면의 경계가 교차되는 해발 165m인 구봉산(九峰山) 정상부와 동향한 계곡 및 서남쪽 능선을 에워싼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성의 전체 모양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에 가까우며, 작은 계곡을 두른 포곡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산상에 오르면 서해의 여러 섬들이 그림과 같이 바라보인다. 당성은 서해 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통하는 출입구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처음 백제(百濟)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高句麗)의 영토가 되어 당성군(唐城郡)이라 하였으나, 신라(新羅)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唐項城)이라 하였다.
「당성(唐城引)」에서 인(引)은 가곡(歌曲)의 이름이다. 이색(李穡)의 「증지인(甑池引)」, 김시습(金時習)의 「유후인(留侯引)」, 홍간(洪侃)의 「난부인(嬾婦引)」, 신흠(申欽)의 「공후인(箜篌引)」, 성현(成俔)의 「사귀인(思歸引)」 등을 보아도 이것이 시와는 구별되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시운(詩韻)을 보면, 蓋(泰去聲) 外(陌入聲) 代(隊去聲) 參(覃平聲) 三(覃平聲) 颿(咸平聲) 祀(紙入聲) 子(紙入聲) 闥(曷入聲) 撻(曷入聲) 日(質入聲) 吉(質入聲) 揖(緝入聲) 及(緝入聲) 泣(緝入聲)으로 평측(平仄)을 넘나들며 행마다 환운(換韻)하고 있으니 사실 시운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인(引)이라는 형식은 어떤 글의 서문, 즉 서인(序引)으로 쓰이기도 한다. 「대전통편인(大典通編引)」, 성삼문(成三問)의 「매은정시인(梅隱亭詩引)」, 정약용(丁若鏞)의 「화기재잠병인(和己齋箴竝引)」 등이 그것이지만 여기서는 가곡의 의미이다. 장시(長詩)이고 정해진 원고량으로 인해 그 중요한 부분만을 짚어나가기로 한다. 잠시 감상해보자.
唐城岸海如華蓋 당성(唐城) 해안은 일산처럼 솟았고
(당성안해여화개)
浦漵環之分內外 개펄은 이를 둘러 안팎을 나누었네.
(포서환지분내외)
英靈所聚産人物 영령이 모여들어 인물을 내었으니
(영령소취산인물)
直幹雄才皆絶代 곧고 뛰어난 인재 모두가 출중했다.
(직간웅재개절대)
德山村主生江南 덕산 촌주[洪天河]는 중국 강남에서 태어나
(덕산촌주생강남)
遼東白帽初往參 처음에는 요동에서 백모(白帽)로 참여했으나
(료동백모초왕참)
猶嫌鶴野近羊犬 학이 노는 들에 견양(犬羊)이 오는 게 싫어
(유혐학야근양견)
欲訪海外仙山三 바다 건너 선산 셋을 찾고자 했네.
(욕방해외선산삼)
舟浮鯨浪得異境 거친 파도에 배를 띄워 별천지를 얻었으니
(주부경랑득이경)
雙目不動停飛颿 다른 곳을 볼 것도 없이 이곳에 정박했네.
(쌍목부동정비범)
下岸卜年又卜世 언덕에 내려선 해 수와 댓 수를 점치고
(하안복년우복세)
日佐東方千萬祀 하루는 동방의 천만에게 제사를 올렸다지.
(일좌동방천만사)
新羅以來至我國 신라 이래 고려에 이르기까지
(신라이래지아국)
禮樂詩書出君子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를 가르쳐 군자를 배출했으니
(예악시서출군자)
壽齋獨步江都末 수재(壽齋, 洪奎)는 원종(元宗) 말에 독보적이라
(수재독보강도말)
掃去妖氛開紫闥 요기를 쓸어내고 대궐문을 열었네.
(소거요분개자달)
紀綱復振朝委裘 기강을 다시 떨쳐서 선왕께 조회하니
(기강부진조위구)
鼠輩無從更挑撻 쥐 같은 무리들이 다시 날뛰지 못했고
(서배무종갱도달)
克生太姒配王室 훌륭한 딸을 낳아 왕실과 혼인하니
(극생태사배왕실)
聖子神孫至今日 거룩한 자손들 오늘날까지 이어졌네.
(성자신손지금일)
於戱德山非常人 오호라! 덕산 촌주는 남다른 사람이라
(어희덕산비상인)
天作之合襲于吉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상서로움을 계승하니
(천작지합습우길)
靑松浮雲翠如濕 푸른 솔이 뜬구름에 젖는 듯하여
(청송부운취여습)
我曾立馬遙相揖 내 일찍이 말 세워 멀리서도 읍했었네.
(아증립마요상읍)
陽坡先生安在哉 양파 선생[洪彦博]은 어디에 계시는가?
(양파선생안재재)
高風千載無人及 고풍은 천년이 흘러도 따를 이 없었건만
(고풍천재무인급)
郗超反鑑似無孫 치초가 치감을 등져 후손이 끊긴 듯하니
(치초반감사무손)
門下有人空血泣 문하에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린다네.
(문하유인공혈읍)
우리 홍씨의 조상인 홍천하는 팔학사의 일인으로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 홍씨나 팔학사 자손들에게는 의심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在府西二十里。有古城。周二千四百十五尺。高十尺。世傳唐遣才士八人。往敎高麗。洪其一也。子孫世貴。名所居曰唐城。(남양도호부 서쪽 이십 리에 고성이 있는데 둘레가 2415척이요 높이가 10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당에서 재사 8인을 보내어 고구려에 가서 가르치게 하니 홍씨는 그 하나이다. 자손이 대대로 귀하였으며 그 사는 곳을 이름하여 당성이라 한다.)
이것을 보면 우리 선시조가 당시대에 고구려로 오셨다는 것이 세상에 공인된 일이고 또한 남양도호부의 성씨항에 홍 송 방 박 최 서씨가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홍씨가 남양부의 제일 저명한 성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사」에 보면 “당시 당나라에서는 도교가 성하였는데 고구려에는 유불만 들어오고 도교가 생적함으로 영류왕7년(624)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청하니, 당도교가 천존상과 도법을 가지고 와서 노자를 청한 일이 있었다. 익8년(625)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다시 불로법을 청하였으며, 영류왕 16년(642)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삼교에 하나를 결하면 불가하니 도교를 청래하자고 건의하였다. 왕이 당에 청하여 다음해에 도사 숙손 등 8인과 노자 도덕경을 보내와 고구려에서 절을 비워 관소로 제공하고 기뻐하였다.”고 되어있다.
이 글을 읽어보면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중국에서 동방(東方)으로 건너온 이후 대대로 번창해왔으나 공민왕 시기에 홍륜에 의해 큰 화를 입게 된 안타까움을 읊은 글이다. 남양홍씨의 보첩(譜牒)에 의하면, 이글에 나오는 덕산촌주(德山村主)가 바로 홍씨의 선시조(先始祖)인 홍천하(洪天河)를 가리키는데, 그는 당(唐)나라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그가 처음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때 고구려에 귀화(歸化)했다가 그 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고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6구 遼東白帽初往參은 후한(後漢) 말기에 위(魏)나라 대유(大儒) 관녕(管寧)이 일찍이 황건적(黃巾賊)의 난리를 피해 요동으로 갔고, 태수(太守) 공손도(公孫度)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위명제(魏明帝)가 후한 예로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며, 항상 무명옷에 검은 두건[皁帽] 만을 착용하여 청빈(淸貧)을 달게 여기고 청조(淸操)를 굳게 지켰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본문(本文)의 백모(白帽)는 곧 조모(皁帽)의 착오라는 설이 있다. 8구 欲訪海外仙山三을 보면 『동국여지승람』의 언급과는 다르다. 고구려에 가서 가르치게 하려고 8학사를 보낸 것과 바다 건너 선산 셋을 찾으려고 온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모이건 백모이건 관리의 신분이 아닌데 8학사라는 것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분명한 사실인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현자의 고증을 기다린다.
15구 壽齋獨步江都末에서 ‘수재(壽齋)’는 남양홍씨로 고려 후기의 정안공신(定安功臣)인 홍규(洪奎)의 호이다. 고려 고종(高宗) 초기에 몽고(蒙古)의 침략에 대비하여 강화도(江華島)로 도읍을 옮기고 강도(江都)라 호칭했다가 원종(元宗) 말기에 이르러 다시 개성(開城)으로 환도(還都)했으므로, 강도의 말기란 곧 원종의 말기를 가리킨다. 당시 원(元)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원종을 권신(權臣)인 임유무(林惟茂)가 배척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자, 홍규가 대의(大義)를 들어서 송송례(宋松禮) 등과 함께 삼별초군(三別抄軍)의 힘을 빌려 임유무를 죽이고 나라를 안정시켰던 데서 온 말이다. 그는 벼슬이 상의첨의 도감사(商議僉議都監事)에 이르고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딸은 또 충숙왕비(忠肅王妃) 명덕태후(明德太后)가 되었다.
25구 陽坡先生安在哉에서 양파선생(陽坡先生)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명신(名臣)으로 호가 양파인 홍언박(洪彦博)을 가리킨다. 그는 바로 홍규(洪奎)의 손자로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남양후(南陽侯)에 봉해졌는데, 그가 저자에게는 좌주(座主)이기도 했다.
27구 郗超反鑑似無孫에서 진(晉)나라 때 치감(郗鑑)은 명신(名臣)으로 진나라를 잘 섬겼는데, 그의 손자인 치초(郗超)는 역신(逆臣) 환온(桓溫)의 막부(幕府)가 되어 환온의 역모에 깊숙이 가담하였기 때문에 마치 자기 조부(祖父)를 배반한 것처럼 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명신 홍언박(洪彦博)의 손자인 홍륜(洪倫)이 공민왕(恭愍王)을 시해하여 끝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으므로, 이를 치초의 고사에 비유한 것이다.
결국 「당성인」은 우리 당성 홍문을 기술한 것이고 덕산촌주 이후로 수많은 인재들이 나와 번성을 하였으나 고려말에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사연이 안타까워 읊은 노래임을 알 수 있다.
도곡 홍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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