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과 글감/도곡논단

청담 민영순전에 부쳐

향수산인 2013. 5. 27. 11:05

 

 

 

書貴有天趣

 -靑潭 閔永順展에 부쳐-

 

 

글씨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가슴속에 도의(道義)가 있어야 한다. 또한 성인과 철인의 학문으로 이를 넓혀야 글씨가 고귀해질 수 있다.[學書須要胸中有道義 又廣之以聖哲之學 書乃可貴]

 

이는 宋의 名書家 黃庭堅의 말이다. 글씨는 붓을 잡은 손으로 쓰는 것이나 결국 그 손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머리[理]요 가슴[情]이다. 손은 그저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紙面에 구사할 뿐이다. 성품이 질박하고 곧은 사람은 곧고 씩씩하게 글씨를 쓰고, 온유한 사람의 필획은 항상 여유롭고 부드럽다. 조급한 사람은 글씨가 긴박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의 글씨는 답답한 느낌이 나며, 신중한 사람의 글씨는 무겁고 둔하다. 글씨를 부지런히 연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필력과 노련함이다. 여기서 얻어진 약간의 성취를 가지고 성공을 이야기 할 수 없다. 道義가 있어야 그 풍격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씨에 도의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인이나 철인의 학문으로 學養을 쌓아야 한다.

 

청담의 40년 서예인생은 당대 최고의 스승을 따라 떠난 窮理盡誠의 여행길이다. 그릇된 길을 가면 차라리 가지 않은 것보다 못하고 잘못된 것을 배우면 차라리 배우지 않은 것보다 못함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한문서예는 여초 김응현선생을 사사했고, 전각은 구당 여원구선생께 배웠다. 한문은 中觀 崔權興선생과 靑凡 陳泰夏선생을 사사했으니 더 이상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것도 모자라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에서 경전학을 전공했고,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에서 「尹德熙書藝硏究」라는 석사학위논문을 발표했으며, 지금은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호남학연구회에서 호남기록문화연구 고서화파트를 맡아 번역을 하고 있다. 논저로는 『揆園史話』과 『한가락時調』가 있고, 공저로 『瑞林吟社』『麗末大節』『南道風雅』『三淸詩社漢詩集』등이 있다.

 

청담은 1984년도부터 여초선생님을 사사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4시에 광주를 출발하여 20년간이나 서울 인사동을 오갔고 스승이 돌아가신 지금도 상황은 달라졌으나 인사동을 오고가는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5권의 서예자전을 걸레로 만들 정도로 공부했으니 그 끈기와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수학을 전공했던 청담은 학교에서 5년간 교편을 잡았는데, 서예를 하기 위해 이를 사직하고 10년 정도 등용문학원에서 강의를 했다고 하니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청담이 좋은 글씨를 위해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가를 알게 된다. 참으로 우직하게 사는 사람이다.

 

이번에 출품한 작품들을 둘러보면 行草・金文・小篆・八分・簡牘・한글・文人畵・篆刻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그 내용은 17점의 자작시를 비롯하여, 중국시・한국시・고전명구 등이 있고 백씨초당기 임서도 보인다. 天符經과 般若心經도 있는데 그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국전지를 22폭이나 이어 쓴 <證道歌>이다. 글씨가 무르익지 않았다면 짧은 시간에 이 많은 분량을 도전할 수나 있을까?

 

청담의 문인화는 글씨만큼이나 자유로워 멀리서 흘깃 보아도 청담을 떠올리게 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한 작가이다. 문인화는 8점이 출품되었는데 그중에 병풍 두 점이 있다. 작품을 보면, 새우・목련・난초・국화・매화・파초・모란・연꽃・대나무・포도・소나무가 다양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곱고 예쁘게 치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길을 달려가듯 시원시원하고 자연스런 풍취가 느껴진다. 작가 스스로도 “書畵同源이지 畵書同源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히 문인화를 알고 치는 사람이다. 文人畵는 畵院畵와 다르다.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쓰다가 남은 먹으로 마음에 담겨 있는 기개를 찰라간 지면에 쏟아내는 것이다. 시를 지어놓고 그림을 그리든가 그림에 맞추어 시를 짓든가 글을 읽다가 느끼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그리는 것이 문인화이다. 청담은 자신이 시를 짓고 그것을 화제로 쓰고 그림도 글씨를 쓰듯이 그린다. 이번 작품이 급하게 썼기 때문에 부끄럽다고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꾸밀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잘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담의 본모습이 더욱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청담의 글씨를 보고 있자면 ‘書貴有天趣’라는 말이 생각난다. 글씨는 천연 그대로의 풍취를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붓이 가는대로 글씨를 쓰는 것을 信筆이라고 한다. 필법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신필을 하면 逆入이나 回鋒을 하지 않게 되고 손이 가는대로 붓을 움직이기에 결국 中鋒으로 운필하지 못한다. 藏鋒도 하지 않고 붓이 치우치는 대로 글씨를 쓰니 결국 신필은 露鋒과 偏鋒으로 운필을 하니 좋은 글씨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자연스런 풍취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착실하고 익숙하게 서법을 익혀 운필을 하면 藏鋒과 露鋒을 넘나들고 中鋒과 側鋒이 뒤섞여 뜻에 따라 붓을 움직여도 天趣가 드러난다. 결국 서법에서 말하는 천연의 풍취는 억지로 하지 않는 자연이다. 공부를 하여 학양을 갖추고 노력을 하여 능력이 생기면 결국 주변도 입장이 바뀐다. 도를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도를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연은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 실상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작품전에 보이는 다양한 변화와 자연스런 필치는 바로 이렇게 피나는 열정과 풍성한 능력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서예인들도 스스로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많은 것을 갖추고 난 다음에 저절로 흘러넘치는 경지에 이르고 나서야 가르침에 임해야 할 것이요, 작품에도 임해야 할 것이다. 스타를 억지로 만든다고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명실 공히 진짜 실력을 갖춘 작가를 선발해야 비로소 그 작가가 서단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서예인들이 노력을 하면 우선은 내게 자신이 생기고, 이러한 자신감은 서예인들이 알고 관람객들이 알고 일반대중들도 알게 될 것이니 작가를 믿게 되고 선생을 믿게 되고 서단을 믿게 될 것이다. 서단에 대한 믿음이 커지면 사람들은 서예를 좋아하게 될 것이요, 서예는 다시 흥성할 것이다. 서단이 흥성하면 서가들이 어찌 초라해질 것인가? 청담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모임을 ‘丕顯書會’라 했단다. 크게 드러날 사람들 공부할 사람들만 뽑았으니, 청담은 포부가 작지 않은 사람이다.

 

잠깐 화제를 돌려보자. 젊은 남녀가 산행을 하며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사내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었고 여자는 산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내의 마음은 정상에 있는데 여자는 산꽃을 보고 산새를 보고 산의 나무를 보고 계곡물을 보고 기이한 바위를 보면서 시간을 끌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짜증이 났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산 정상에 오른다지? 저 여자는 왜 나를 따라주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가 결혼해서 함께 살 수 있을까? 조금 길을 걷다가 다시 생각을 해봤다. 지금 내가 왜 산을 오르고 있는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산정상에 올라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천천히 올라가도 될 것을… 주변을 둘러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올라도 되는 것을… 친구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더 중요한데…….

 

예술가의 삶이란 진정한 자기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하다. 붉은 고기 덩어리 속에 들어있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진짜 나라는 사람을 만나는 작업이다. 진짜 나를 만나는 내면으로 떠나는 영원한 순례의 길이다. 맛나는 음식을 먹으면 하루정도야 배가 부를 것이나 어느 날 문득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면 죽을 때까지 행복할 것이다. 이러한 행복을 누리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청담의 글씨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무리 익숙하게 아는 길이라도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있었으면 좋겠다. 지면이 붓을 잡고 붓도 지면을 붙들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밀치고 힘차게 나아가는 澀氣도 필요하다. 언제나 바르게 열심히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취해 비틀비틀 걸으며 바라보는 세상도 실수하고 웃는 속에 세상사는 재미도 느껴진다.

 

이번에 청담이 보여준 글씨는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대로의 삶이다. 마무리를 하려니 청담의 자작시 가운데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除夜>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지난해 섣달그믐에 가는 세월이 안타까워 읊은 시 같은데 한참을 읊조리다보니 여러 가지 의미들이 떠오른다.

 

窓前綠竹寒風歎 창 앞에 푸른 대는 찬바람에 신음하고

屋後蒼松酷雪爭 집 뒤에 푸른 솔은 혹설과 다툰다네.

倏忽光陰顔萬皺 빠른 세월 얼굴엔 쭈글쭈글 주름지고

紛紜世事鬢千莖 어지러운 세상일에 백발이 성성하다.

 

신록이 아름다운 오월에 도곡 홍우기

 

 

 

 

 

 

 

 

 

 

 

 

 

 

 

'서론과 글감 > 도곡논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北山途中  (0) 2013.11.19
당성인(唐城引)  (0) 2013.05.28
충정공의 아제시  (0) 2013.03.15
도전하는 자가 꿈을 이룬다  (0) 2012.11.02
忠平公의 行狀을 보고  (0) 2012.10.24